▲성균관 수준으로 지어진 경주향교는 경주의 조선 시대 위상을 잘 말해주는 건물이다. 사진은 경주향교 대성전
정만진
경주향교 또한 조선 시대 경주 선비들의 큰 기림을 받았던 곳이다. 경주향교에는 공자 이하 조선의 통치 이념을 이루는 성리학의 상징적 인물들이 위패로 모셔져 있었다. 경주향교는, 신라 천년의 서울이었던 경주의 위상에 걸맞게, 처음부터 국가의 중앙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과 거의 대동소이한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경주향교는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공자를 한 가운데에, 그리고 그 좌우에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네 분을 모셨다. 이 다섯 분을 흔히 5성(五聖)이라 한다.
5성 좌우에는 안회 등 공문10철(孔門十哲)이라 부르는 공자의 제자 10분과, 주희 등 송조6현(宋朝六賢)을 각각 반씩 나누어 그 위패를 모셨다. 이 역시 성균관과 똑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경주향교는 스스로 성균관에 맞먹는 교육기관임을 자부했던 것이다.
성균관은 한국18현(韓國十八賢)이라 하여 공자의 위패 왼쪽에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의 아홉 분, 오른쪽에 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의 아홉 분을 모셨다. 그러나 경주향교는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네 분을 모셨다.
성균관 누리집의 '성균관의 역사' 축약 |
성균관(成均館)의 의미 고려 말과 조선 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이름이다. 성균은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위치와 연혁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 24년(1298) 성균감(成均監)이 되고, 충선왕 원년(1308) 성균관이 되었다. 공민왕 5년(1356)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조선 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 때는 개성, 조선 때는 현재 자리에 위치했다. 태조 7년(1398) 건물이 지어져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학제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입학이 허가되었고,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불렀다. 생원ㆍ진사가 아닌 재학생도 있었는데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 소학에 능통한 자 등)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불렀다. 정원은 초기에 200명이다가 뒷날 100명으로 축소되었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에 상한선은 없었다.
교과과정 및 교수방법 주요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쳤다. 대학(1달), 논어(4달), 맹자(4달), 중용(2달), 시경(5달), 서경(5달), 주역(7달) 순서로 정밀하게 가르치고 배웠고, 그 외 춘추(5달)와 예기(7달)를 학습햇다. 이를 마치면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初試)를 보게 하였다. 노장(老莊)ㆍ불경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게 했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개별 지도에 치중했으며,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문묘와 교육시설 성균관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 선조 34년(1601) 재건에 착수, 6년 후 대체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도 그 내용이 같았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4성, 공문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나라 6현(賢)을 모셨고, 동ㆍ서무(東ㆍ西廡)에는 주ㆍ한ㆍ진ㆍ당ㆍ원ㆍ송나라 94위(位)와 우리나라 신라ㆍ고려ㆍ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 뒤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봉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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