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1년 조신통신사 정사의 평상 관복 모습(왼쪽)과 풍신수길 대면시의 복장. (합천의병관 전시물 재촬영)
합천의병관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주부윤은 윤인함이었다. 그런데 <경주선생안>을 살펴보면 그 직전 부윤이 황윤길이다. 황윤길이라면? 전쟁 직전 일본에 다녀와 풍신수길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보고한 통신사 정사이다. 부사 김성일은 그 반대의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이현배도 서인이었다.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 세력은 서인을 내치고 동인을 싸고도는 데에만 급급, 이현배를 내쫓은 것은 물론 황윤길의 보고도 묵살했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황윤길은 1588년 11월부터 1589년 10월까지 경주부윤으로 있었다. 일찌감치 파직된 이현배의 후임 구사맹이 경주부윤의 임기 930여 일을 모두 채운 다음인 1588년 11월 부임했다. 특히 황윤길은 1590년 5월 조선통신사 자격으로 경주에 묵었다. 당연히 경주의 유력 선비들은 잘 아는 사이인 황윤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그 대화는 임진왜란을 대비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터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선비들 모여 전쟁 걱정경주 일원 선비들은 1590년(선조 23년) 8월 1일 처음으로 대규모 회합을 가졌다. 경주 11인, 울산 6인, (경북) 영천 2인, (경북) 안동, (경북 포항) 흥해, (경북 영덕) 영해 각 1인, 모두 22인이 참가한 이날 모임에서 선비들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경영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할 수 있을지를 두고 '경국안민책(經國安民策, 류정 <사의사실기>)'을 의논했다. 또 '지식인의 고뇌와 포부의 우국(憂國)의 정신이 넘쳐 흐르는(<경주부의 임란항쟁사>)' 시회(詩會)도 열었다. 이응춘, 김응하, 견천지, 이눌, 이계수, 김광복, 최홍국, 김춘룡, 김응생, 이여량, 이태립, 윤홍명, 류정, 서인충, 장희춘, 이경연, 류백춘, 정세아, 조덕기, 금난수, 정삼고, 김인제 등의 '동지(<사의사실기>)'들이 모인 곳은 불국사 범영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