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려면 꾸준히 인간관계를 챙겨야 해요"
참여사회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수강생을 대상으로 한 <백인보> 인터뷰를 한 게 5년 전인데, 이렇게 다시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 문득 지난 5년간 난 잘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동안 모아놨던 자료들도 찾아보고 그랬어요."그녀의 손에는 최근에 공부한 자료들과 5년 전 내가 썼던 인터뷰의 출력물이 들려 있었다. A4용지 7장이 넘는 분량. 그러나 그 긴 글을 쓰면서도 난 그녀의 삶을 다 담지 못해서 갈증을 느꼈었다. 근데 이번엔 원고지 28장에 모두 담아야 한다. 망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 기간이 37년이에요. 사서라는 직업의 매력? 단연 책이죠. 책은 제게 가장 편한 친구예요. 지난 5년간 심도 깊게 읽은 책만도 80권쯤 돼요."그녀에게 책은 단순히 문화생활의 수단이 아니다. 때론 벗으로 때론 스승으로 70년이 넘는 인생길 함께 걸어온 동행. 37년이란 세월을 거치며 자신의 젊은 날을 전부 '사서'라는 단 하나의 일에 바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것이 '책'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서란 원래 책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 연구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직업인데, 우리나라 사서는 사환이 해야 하는 일부터 관장이 하는 일까지 전부 다하고 있죠. 그만큼 체계가 없어요. 또 요즘은 전산화로 인해 사서의 입지가 좁아졌죠. 사서라고 하면 책 많이 봐서 좋겠다고 하는데, 한 권의 책이 도서관의 서가에 꽂히기까지 거쳐야 하는 작업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요."책을 읽을수록 '내가 뭘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겸손의 마음만 커진다는 그녀에게 책 추천을 부탁했다. 이른바 베테랑 사서가 꼽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보석과도 같은 책들'이다.
"일단 너대니얼 호손의 책은 <주홍글씨>만 알려졌는데 다른 작품들도 좋은 것들이 많아요. 조지 오웰의 짧은 에세이들도 무척 좋고요. 기자 출신의 오웰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들이 많아 생생함이 압권이죠. 영문학과 학생들이 주로 접하는 조셉 콘래드의 작품도 대중적이진 않지만 좋은 작품들이 많아요. 최근엔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함께 읽었는데 셰익스피어 작품들에서 인용한 문장이 많이 나와서 무척 인상적이었어요."책에 관한 그녀의 이야기를 길게 듣다가 조셉 콘래드라는 이름 앞에서 잠시 멈칫 했다. 어, 들어본 이름인데. 집에 돌아와 책장을 뒤지니 <어둠의 심연>이라는 책이 늠름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간신히 제목을 찾아냈으나 이번엔 내용이 가물가물. 손톱 크기의 USB만도 못한 내 기억저장소 앞에서 느끼는 짙은 무력감. 이렇게 나는 또 한 번 책 앞에서 겸손해진다.
인생, 어디까지 해봤니?한 항공사의 광고 카피. '미국, 넌 어디까지 가봤니?' 이 회사의 광고 시리즈를 볼 때마다 난 약이 올랐다. 근데, 그녀의 인생 이야기가 꼭 그 광고를 닮았다. '인생, 넌 어디까지 해 봤니?'라고 묻는 것 같은 그녀의 삶 앞에서 난 생전 처음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꼬마처럼 고개를 한껏 젖히고 그 자세로 '정지' 중이다.
"여행을 많이 했죠. 2011년엔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에 갔었고 2012년엔 미국 동북부에 갔었고 그 여행의 끝자락엔 캐나다로 떠났고…. 기억에 남는 여행은 작년에 갔던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예요. 산악지대라 공기도 맑고 아직까진 자본의 물이 덜 들어서 사람들도 예쁘게 살고 있고요." 분량 때문에 그녀의 여행 이야기는 여기서 줄인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들은 어쩐다? 인터뷰 사상 최초로 그래프를 넣어? 아, 정신을 다잡고 정리를 하자.
먼저, '공부'. 사서로 재직하면서 교육대학원에 입학해 사서공부를 조금 더하고 모교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 석사과정도 수료함. 그러다가 다시 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에 입학. 그때만 해도 방송통신대는 5년제였음. 정식적(?)인 공부는 이렇고 대중강의나 '수유너머'와 같은 공부공동체에서도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공부를 계속해 오고 있음. 아카데미만 해도 2009년 개강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수강 중임.
그 다음 '취미'. 예전엔 아마추어 무선을 열심히 했음. 한창 때는 자동차에 통신기구 달고서 아마추어 무선사들하고 아침 출근 때마다 서로 통신을 주고받았음. '어디 길이 막힌다, 어디에 사고가 났다' 이러면서. 그러다 먼 나라의 사람들과도 통신이 하고 싶어 '에스페란토'를 배움. 에스페란토 국제대회에도 여러 차례 참석. 연극, 영화, 발레, 재즈댄스, 한국무용 등에도 관심이 많아 엄청 보러 다녔음. 워낙 산을 좋아해서 지금도 월요일이면 친구들과 등산을 함.
마지막으로 '사회봉사'. '생명의 전화'에서 30년(!) 넘게 자원봉사를 함. 오랜 시간 고통 받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내 삶을 잘 추슬러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음. 2007년부터는 호스피스 자원봉사도 시작. 호스피스 교육을 150시간 받고 실습도 100시간 이수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마음으로 돌보며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음.
내가 봐도 너무 거친 요약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면 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다시 처음이라오'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일독하길 권한다. 그곳엔 요약에서 빠진 '연애' 이야기도 있다. 일생에 울어야 하는 눈물을 그때 다 쏟았다는 그 사랑을 두고 그녀가 왜 '스캔들'이라 부르는 지도 그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쨌든 파란만장한 부분이 무사히(?) 정리되었다. Fine finis!(에스페란토어로 '드디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