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보는 법열심히 적어가며 가르치는 아빠
이희동
어디 그뿐인가. 유치원 가는 길은 내가 까꿍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시간이기도 했고, 반대로 까꿍이가 내게 문제를 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일례로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까꿍이에게 시계보는 법을 가르쳤고, 까꿍이는 전날 배운 세계지리 상식들을 내게 문제로 내곤 했었다.
"지금 몇 시게? 큰 바늘이 숫자 5에 가 있네.""흠. 어려운데. 20분? 25분? 그럼 아빠도 맞춰봐. 인도 사람은 어떤 음식을 먹게?""카레.""어? 어떻게 알았어? 인도 가봤어?""아니, 아빠도 세계지리 좋아했었어. 우리 나중에 여유가 되면 같이 인도 가서 사람들이 진짜 카레 먹는지 구경해보자.""그래, 좋아." 결국 이와 같은 대화는 까꿍이와 내가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물론 아이에게 시계의 숫자 5가 25분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아이의 빤한 문제에 매번 답하는 것 역시 힘든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과정을 통해 까꿍이는 아빠에게 서슴지 않고 뭐든지 말을 하게 됐고, 아빠라는 존재를 깊숙히 받아들이게 됐다. 내가 까꿍이를 등원시켜주지 못했다면 얻기 힘든 과정임에 분명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그렇다면 내가 까꿍이랑 유치원을 가면서 녀석에게 제일 강조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평등하고 따뜻한 시선이었다. 유치원에 가던 어느 날 까꿍이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아빠, 우리 반에 이상한 아이가 있어.""응? 왜? 어떤 아이인데?""같은 아람반인데, 자꾸 우리더러 자기를 언니라고 부르래. 자기가 한 살 많대.""그래? 작년에는 푸른반이었던가?""아니 똑같이 아람반이었대. 그런데 좀 이상해. 우리랑 같이 놀지 않고 맨날 혼자서 블록 쌓기만 해."이야기만 들어도 충분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까꿍이 반에 학습이 더딘 아이가 있어서 초등학교를 올라가지 않고 1년 더 유치원 생활을 하게 된 듯했다. 그러니 아이는 계속 언니라 부르라고 하지만, 정작 행동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어눌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