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정인홍이 김면, 박성, 곽준, 곽율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해 적을 토벌했으며, 손인갑이 중군장으로 무계에서 왜적을 제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합천창의사 유물관은 그 부분을 펼쳐서 보여주고 있다.
합천창의사
급박했던 임진왜란 초기에는 선조도 의병들에게 감지덕지했다.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전쟁 발발에 대비를 하지 않았던 탓에 압록강 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선조가 "나라의 목숨이 의병들 덕분에 유지되었다"라고 토로하는 대목을 보여준다. 같은 해 11월 16일에도 선조는 "변란(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인심이 흩어졌는데 의사(義士)들이 한 번 창의(倡義)하자 군민(軍民)이 호응하여 국가가 오늘날까지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의병들의 힘이었습니다"라는 사간원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야 의병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딴청을 부린다. 1601년 3월 14일자 <선조실록>은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사들의 은혜다, 우리 장수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패잔병의 수급을 얻었을 뿐 적장의 머리 하나를 베거나 적진 하나를 함락한 적이 없었다,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이 다소 나을 뿐이다, 명군이 들어오게 된 것은 모두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명나라에 호소한 덕분이다, 그 공로로 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라며 의병과 조선군을 멸시하는 선조의 본얼굴을 보여준다.
선조보다 오히려 일본이 제대로 평가한 의병들의 활약
의병들의 활약을 제대로 평가한 (1)의 발언은 (또, 뜻밖에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나왔다. 합천창의사 간행 <합천임란사 2집>은 '의병을 일으킨 자들로 전라도에 김천일, 고경명, 최경회의 무리가 있고, 경상도에는 곽재우, 김면, 정인홍의 무리가 있으며, 충청도에는 조헌 및 승려 영규 등이 있어, 때로는 산과 숲에 모여 있고, 때로는 우리(일본)의 수비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들의 전투는 모두 서로 연결되지 못해 단편적이기는 했지만 아군의 후방을 걱정스럽게 하여 대병(大兵)을 전방에 집결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라는 일본군 참모본부의 기록을 보여준다. 이 기록은 일본군 참모본부가 1924년에 출간한 <일본 전사(日本戰史) 조선역(朝鮮役, 임진왜란) 본기(本記) 부기(附記)>에 실려 있다.
▲합천창의사 유물관에서 보는 의병 장수의 복장. (왼쪽) 관리가 되었을 때의 관복 (오른쪽) 전투복
합천창의사 유물관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의병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칼을 들었고, 또 어떤 공을 세웠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합천창의사의 합천임란창의사적비문(陜川壬亂倡義事績碑文)을 읽어본다. 합천임란창의사적비문은 '경상남도 합천에서 임진왜란 때 일어난 의병들의 일을 기록한 비석의 글'이므로 의병들의 생각과 활동을 알아보는 데 아주 적격일 듯하다. 다만 실제 비석에서 글자를 다 해독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합천임란사 2집>에 게재되어 있는 전문을 읽는다.
'나라가 평화로우면 뜻을 펴서 그 번영에 힘쓰고, 어지럽거나 위태로우면 분연히 일어서서 그 수습에 신명(身命, 몸과 목숨)을 바친다. 국가에 흥망(興亡, 발전과 멸망)이 있고 민족에게는 성쇠(盛衰, 성장과 쇠약)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땅 합천 고을의 사람들은 역사의 고비마다 악선호의(樂善好義)하는 미덕(美德, 아름다운 행동)으로, 내 나라 내 겨레 내 고장을 온몸으로 가꾸고 다듬고 지켜왔다.'의병이 된 것은 착하고 의로운 성품 때문기꺼이 의병이 된 것은 악선호의, 즉 착한(善) 것을 즐기고 옳은(義)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는 선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합천의병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조식의 <남명집>에 나온다.
조식과 경상우도 의병장들 |
경상남도 의령군 의병박물관은 '경상우도 의병 활동의 특징' 중 한 가지로 '경상우도 의병장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 출신'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합천이 경상우도의 일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합천의병장들의 스승은 당연히 남명 조식이다.
조식은 안동의 이황과 나이가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출생했다. 이황은 선조 4년인 1571년, 조식은 그 이듬해인 1572년에 타계했다. 70 평생을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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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년 9월 18일 조식은 이황에게 <여퇴계서(與退溪書)>라는 편지를 보낸다. 스스로를 '못난 동갑내기'로 자칭한 조식은 이황에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近見學者)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것도 모르면서(手不知灑掃之節)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고(而口談天理)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計欲盜名)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而用以欺人), (중략)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十分抑規之如何)" 하고 말한다.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하게 하고, 글을 미사여구로 꾸미는 일에만 관심이 많은 제자들을 경계하자는 뜻이다. 편지 속 조식의 생각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처사(處士, 벼슬 하지 않은 선비)라고 하면 옳지만 유자(儒者,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로 지목한다면 사실에 어긋한 것이다"라고 했던 말과 뜻이 같다. 이이가 <석담일기>에 조식의 이 말을 실은 것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선비다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