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마을 유래비. 조선 중엽 오씨와 김씨 등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당시 마을 모양이 닭(鷄)이 춤추는(舞) 것과 흡사하여 무계(舞鷄)라 불렀으며, 그 후 손씨와 이씨 등이 거주하게 되면서 물가(溪)에서 번창하는(茂) 마을이라는 뜻에 무계(茂溪)라는 새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곳에서 일본군들을 격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정만진
사실 의병들은 4월 13일 개전 이래 줄곧 패전 소식만 들었다. 4월 14일 부산진 전투(부산진첨사 정발 전사), 4월 15일 동래 전투(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4월 18일 밀양 전투(군관 이대수, 김효우 전사), 4월 19일 김해 전투(4명의 의사 송빈, 이대형, 김득기, 유식 전사), 4월 21일 경주 전투(일본군 무혈 입성), 4월 24일 상주 전투(이일 패주, 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 의병장 김준신, 김일 전사), 4월 26일 문경 전투(문경현감 신길원 전사), 4월 28일 충주 전투(신립,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조방장 변기 전사), 4월 28일 추풍령 전투, 4월 30일 (선조와 조정)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란, 5월 2일 한양 함락......
전쟁 발발 한 달 지나자 아군도 이기기 시작그러나 5월에 들어서면서 아군이 이기기 시작했다. 5월 7일 옥포 해전, 합포 해전, 5월 8일 적진포 해전, 5월 16일 해유령 전투, 5월 29일 사천 해전, 6월 3일 당포 해전, 6월 5일 당항포 해전...... 왜적을 통쾌하게 무찔렀다는 기쁜 소식이 잇달아 의병들에게 들려왔다. 무계의 일본군과 70리(28km) 떨어진 (경남 합천) 야로에 진을 친 채 서로 맞서고 있던 합천의병의 사기가 하늘로 치솟은 것은 당연했다.
합천의병 중군장 손인갑은 본래부터 장수였다. 임진왜란 의병장들의 상당수가 선비로서 고향 장정들을 규합해 창의한 데 견주면 그는 경력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손인갑은 1544년(중종 39) (경상남도) 밀양부 서면 서가정리에서 태어나 1571년(선조 4)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부산첨사 등을 역임한 후 1577(선조 10) 관직에 물러났고, 1597년부터 창녕군 대합면 장기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손인갑은 즉시 경상감사 김수에게 달려갔다. 손인갑은 동래현령으로 임명되었지만 이미 동래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으므로 부임하지 못하고 감사를 수행했다. (동래는 원래 부였으나 부사 송상현이 전사한 뒤 지역의 위상이 격하되어 현으로 떨어졌다.)
5월 4일, 경상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손인갑은 김천역 앞에서 왜군과 마주쳤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던 손인갑은 용맹을 뽐내며 적의 수급 열일곱을 취했고, 왜군들은 물러갔다. 김수는 정인홍에게 합천, (경남 합천) 삼가, 초계, (경북) 성주 등의 군대를 이끌 군사권을 맡기면서 (동래현감 직무 수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손인갑을 합천의병군의 중위장(中衛將, 중앙을 지키는 핵심 장수)으로 활약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