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들은 여유롭게 먹이를 기다린다.
이준수
'만약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면 기니피그는 어떻게 될까? '
죽음. 슬프게도 사망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미래를 가정해보았다. 충분히 영양을 섭취한 토끼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새끼들도 어미 젖을 양껏 빨며 튼튼하게 자란다. 토끼는 다산왕이다.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반면 기니피그는 부족한 먹거리로 신체 기능이 저하되고 새끼들의 생존율도 낮아진다. 시간이 갈수록 토끼와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기니피그는 자연스레 생존게임에서 아웃된다.
잠깐, 생각해보자. 기니피그가 피골이 상접하여 비극적으로 멸종했다. 토끼에게는 잘못이 있을까? 없을까? 토끼는 신체적 이점을 살려 정당하게 먹이 쟁탈 싸움에서 승리했다. 타고난 능력에다가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다. 태어나 보니 이미 남들보다 유리한 자질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토끼에게 죄를 묻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기니피그는 어떨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경쟁자를 이길 수 없는 존재에게 도태와 절망은 당연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학교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몇몇 아이들을 편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교사 임용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발령은 받았는데 3월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어리바리하게 있는데 옆 반 선생님이 가정환경조사서를 보내주셨다. 학기 초에 받아서 갖고 있으면 학급 운영하는데 편하다는 조언을 보태셨다. 양식을 확인했는데 좀 놀랐다. 부모님 직업과 나이, 자가 월세 전세를 구분하여 거주형태를 묻는 항목이 있었다. 선배가 주면 주는 대로 쓰는 게 맞는지 알고 그대로 복사해서 가정통신문으로 내보냈다.
다른 애들은 다 제출했는데 H양 종이만 없었다. 따로 불러 물어보니 엄마는 없고 같이 사는 아빠가 계속 안 써줘서 혼자 작성하고 있었다고 했다. 웬만한 질문에는 답이 달려있었는데 거주형태에서 끙끙대고 있었다. 한편 'e편ㅇ세상(아파트 이름)'에 사는 J군이 어디서 들었는지 자기 집은 완전한 자가이며 교동의 다른 집은 전세를 주고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J군 말을 듣고 L양도 아빠가 건물이 있다고 호응했다. 금메달, 은메달 잔치 속에 민망했는지 H양이 슬며시 와서 귓속말을 했다.
"선생님, 저는 원룸인데 뭐라고 써야 돼요?"
같은 8평짜리 원룸에 사는 동지를 만나 반가웠다. 나는 보증금 500에 30만원 내는 월세방이었지만 H양에게는 자가에 동그라미 치라고 했다. 아니라도 어쩌겠는가? 월세 체크하면서 어린애를 기죽이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되지도 않은 가정통신문을 보낸 선생의 잘못이었다. 이듬해부터 가정환경조사서를 상담조사지로 바꿨다. 부모 경제력과 관련된 내용을 싹 뺐다.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취한 조치였는데 반 학기만 지내다 보면 저절로 살림살이가 가늠되었다.
가난은 생활의 불편함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서와 사고방식도 어둡게 만들었다. 낮은 자존감, 멍함, 부정적인 세계관, 불확실한 미래예측, 타인에 대한 불신감... 집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과 함께 있다 보면 슬퍼졌다.
'왜 궁핍함이 마음까지 쪼그라들게 만드는 걸까?'
나는 편애를 했다. 훌륭한 교사의 자질인 공정성을 지키지 못하고 특정 아이들을 더 챙겼다. 인원이 한정된 무료 캠프에 꽂아주고, 서점에서 홍보용으로 문제집이 나오면 가방에 넣어줬다. 일기검사를 더 꼼꼼하게 하고 코멘트도 한 줄 더 달았다. 반장 엄마가 어린이날 기념으로 보낸 피자빵이 남으면 수업 마치고 검은 봉지에 싸서 들려 보냈다.
일년이 지나 반이 바뀔 때 편애했던 꼬마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편애를 후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