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경내에 오르는 길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오르는 길,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이 반갑게 인사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다.
서부원
지난 25일 해인사로 봄 마중을 나섰다. 대개 탐방객들은 주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팔만대장경을 향해 내달리지만, 해인사만큼 숨은 볼거리가 지천인 절이 또 있을까 싶다. 그나마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절의 맨 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서망정이지, 만약 입구에라도 있었다면 절 안마당으로 들어와 보지도 않았을 성 싶다. 서둘지 않고 안내판만 찬찬히 읽어봐도 해인사가 달리 보일 것이다.
절에 오르는 길,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철 스님의 승탑(부도)을 놓치긴 아깝다. 그의 가르침을 현대적 조형미로 형상화 한 승탑 앞에서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언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성철 스님의 사리를 모셔놓은 이 승탑은 지난 1999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환경문화상을 수상한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해인사 관광 안내판과 나란히 자리한 곳에 생뚱맞은 삼층탑 한 기가 눈에 띈다. 이름조차 생소한 묘길상탑으로, 딱히 예술적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작품인데도 보물 제1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폐허가 된 절터 등에서 옮겨온 게 아니라면 마땅히 법당 앞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텐데, 절에서 쫓겨난 듯 일주문 바깥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그다지 볼품이 없어 탐방객들에게 별 관심을 끌진 못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문화재는 아니다. 호족세력이 할거하고 농민봉기가 들불처럼 번지던 신라 말, 왕실의 편에 서서 맞서 싸우다 전사한 수십 명의 해인사 승려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위령탑이다. 더 이상의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 없지만, 당시 절이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결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 재미있는 건, 이러한 내력을 담은 탑지를 작성한 이가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이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 조정에 환멸을 느꼈을 그가 임금에게 보인 마지막 충정이었을까. 묘길상탑이 감추고 있는 역사의 비밀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장경판전에서 멀지 않는 절 뒤편에는 천 년 수령의 아름드리 전나무 한 그루를 이고 있는 학사대라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최치원이 시와 서를 즐기며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데, 일설에는 고무신 한 켤레를 벗어두고 홀연히 산속으로 사라진 터라고도 한다. 그 전나무도 당시 최치원이 거꾸로 꽂아둔 지팡이가 자라 무성해진 것이라고 전한다.
그뿐 아니다. 장경판전 내 법보전에 모셔진 목조 비로자나불좌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으로, 883년이라는 제작년도가 밝혀져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인사의 창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불상인 셈인데, 아무리 금을 입혔다고는 하나 천 년을 견뎌낸 나무라니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나무의 나이로만 본다면 이 불상이 팔만대장경보다 한참 선배다.
일주문 못 미친 곳에 세워져 있는 '원표'도 스쳐지나가기 아까운 유물이다. 해인사에서 동서남북 방향의 주변 고을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사각 돌기둥으로, 절에 세워진 것으로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대구부, 김천군, 진주군 등의 낯선 지역명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당시에도 해인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실 해인사는 대학시절부터 단골 답사코스였다. 죽으나 사나 팔만대장경만 팔며 호객하거나 규모가 크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그런 절이 아니었다. 근래 들어 군데군데 무늬만 기와집인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 경내가 조금 어수선하고 답답해진 느낌이 있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사연이 있고 역사가 담긴 해인사는, 고백하건대, 늘 가도 또 가고 싶은 몇 안 되는 절이다.
오죽하면 딸 이름을 낳기 전부터 해인이라고 지었을까. 출생신고를 하는데 주민 센터 직원이 사람 이름에 도장 인(印)자를 쓰는 경우는 처음 본다며 한자가 맞는지 재차 묻곤 했다. 명색이 가톨릭 신자가 딸의 이름을 절에서 따왔다고 하니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에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강물을 다 받아주는 바다처럼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거라며, 내 방식대로 해석해 설명해주었다.
'오직 현금 결제만 가능' 못내 아쉬운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