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풍세 효자비'의 비각 앞 안내판
정만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12호인 '성풍세 효자비(成豊世 孝子碑)'는 고령군 다산면 나정동 127번지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첫째, 이 효자비를 답사할 분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이다. 둘째, 효자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碑閣) 앞의 안내판에 주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본래 문화재의 현지 안내판은 그것의 공식 이름('포석정'이 아니라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 식), 등급(국보, 보물 등), 소재지(주소)부터 밝힌 후 그 아래에 해설을 붙여 둔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과 내용이 대동소이한 이곳 안내판의 본문을 읽어본다. 주소는 빠져 있지만 핵심을 잘 정리한 문장이어서 읽기에 아주 좋다. 먼저 안내판은 이 비를 '이름난 효자였던 성풍세(1572~164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 44년(1768)에 건립된 효자비'라고 정의한다. 안내판은 답사자에게 네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성풍세가 얼마나 이름난 효자였는지 말해주는 안내판 안내판은 기림의 대상이 된 인물(성풍세), 그가 기림을 받게 덕목(효행), 비석 건립 시기(1768년)를 드러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좀 더 세심한 독자는 겉으로 강조된 이 세 가지만이 아니라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안내판의 본문은 성풍세가 얼마나 '이름난 효자'였던가를 글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성풍세는 본인이 죽고 나서 무려 119년이나 지난 뒤에 효자비가 세워졌다. 이는 그가 잠깐 동안만 기억되는 데 머물지 않고 1세기 이상이 지난 후세에도 변함없이 회자되었던 대단한 효자였음을 증언한다.
성풍세 효자비(아래 효자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대 위에 높이 0.86m(폭 0.45m)의 비신(碑身, 빗돌)을 세우고 반원형의 연꽃 문양을 조각한 비 머리를 얹어 놓았다.' 이 효자비는 '임진왜란 때 (경북) 성주 노곡에 피난갔던 성풍세가 난세로 세상이 어려웠음에도 낮에는 의병에 가담하고 밤에는 노모를 극진하게 봉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므로 조정과 마을사람들이 앞다투어 세운 기념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