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일주문. 이곳부터가 진정한 해인사 경내이다. 일주문 아래를 스님 세 분이 지나가고 있다. 현판의 글씨를 쓴 이가 김규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금강산 건봉사와 구룡폭포가 연상된다.
정만진
일주문 닿기 전에 성철 스님 사리 봉안처, 비림(碑林), 해인사 사적비, 아사달 아사녀 전설과 일정 부분 닮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영지(影池) 등을 만나지만 아무래도 해인사의 진정한 경내는 이 문을 통과하면서부터이다. 마침 세 분의 스님들이 문 아래를 지나 안으로 나란히 들어가신다. 따라붙어 세 분의 말씀을 엿들으며 걸어보려고 발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일주문 현판 아래에서 걸음은 멈칫 정지되어 버린다. 현판의 글씨 때문이다.
'가야산 해인사' 현판에 글씨를 쓴 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이다. 김규진은 일제의 침탈로 나라가 식민지가 되고, 제자였던 영친왕이 바다 건너까지 끌려가는 일이 발생하자 복잡한 화법의 그림을 버리고 그 대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문인화류, 특히 묵죽도(墨竹圖)에 전념한 조선 말기의 화가이다. 그는 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사진관을 연 개척자이기도 하다. (김규진에 대해서는
'김규진의 글씨를 보며 통일을 꿈꾼다' 기사 참조)
건봉사는 쑥대밭이 되었지만 해인사는 6.25 때 무사하지만 지금 그를 생각하느라 발길이 멈춰선 것은 아니다. 이 현판을 보는 순간 금강산 건봉사의 일주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절 일주문 편액에 김규진이 쓴 '불이문' 글씨가 연상되었고, 낙산사, 신흥사. 백담사 등을 거느린 거대 사찰 건봉사가 6.25전쟁으로 산산조각 파괴된 사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너무나 해인사와 대조가 되는 그 역사가 가슴아프게 되새겨졌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에 있는 건봉사는 1465년에 세조가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했던 사찰이다. 한때 3183칸이나 되는 놀라운 규모였지만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말미암아 전소(全燒)되었다가 복원을 거쳐 1911년에는 9개 말사(末寺)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로 부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여에 걸친 아군 5, 8, 9사단 및 미군 제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에 자리잡고 있었던 탓에,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현지 안내판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