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관 관람 안내도
합천창의사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아래 창의사) 유물관에 들어서면 현관 정면에 걸려 있는 정인홍의 시 <과무계(過茂溪, 무계를 지나며)>가 맨 먼저 나그네를 맞이한다.
정인홍이 이 시를 지은 1595년, 평양과 서울에서 후퇴한 왜적들이 남해안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데도 조정 일부는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자고 주장했다.
배후에는 명이 있었다. 일본군이 평양성을 차지하고 있던 1592년 9월 이래 명나라가 꾸준히 제기해 온 강화 논리를 조선 대신들이 대변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인홍은 시를 지어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혼자서 지난 날 왜적과 싸웠던 (경북 고령) 무계를 지나노라니, 강물은 여전히 한을 품고 길게 흐르고 있도다. 그런데도 왜적들과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장을 한단 말인가? 원통하게 죽은 우리 장수와 군사들을 벌써 잊었는가…."
4부로 나뉘어 있는 유물관 내부정인홍의 시를 읽은 후 왼쪽으로 접어들어 '관람 안내'를 본다. '관람 안내'는 유물관 내부가 4부로 구성돼 있다고 말해준다. 4부의 제목은 각각 <임진왜란 발발> <항일 의병의 활약> <합천 의병의 활약> <합천 의병의 맥>. 게시물의 본문들을 보지 않더라도 임진왜란 당시 전국 상황, 전국 의병 활동, 합천 지역 의병 활동, 독립운동으로 연결된 합천 의병의 정신이 차례대로 해설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현관 바로 왼쪽 벽이 <임진왜란 발발>이다. 주된 내용은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와, 지도로 보여주는 '임진왜란 상황도'이고, 조총도 진열돼 있다.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를 요약하여 읽어본다.
삼정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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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의 재정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으로 주로 구성되었다. 전정은 매년 생산되는 곡식에 대해 공정한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제도였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소유하지 않은 땅에 세금을 거두고, 몇 배나 더 거두는 등 '전정 문란'이 심해졌다.
군정문란도 마찬가지였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았고, 군대 가는 대신 납부하는 군포(軍布)도 불법으로 면제받았다. 결국 옆집사람에게 이를 강제로 징수하고, 아이와 죽은 사람에게까지 거두는 문란 상황이 벌어졌다.
환정은 봄에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뒤에 돌려받는 제도인데, 이 역시 문란해졌다. 본래 1/10만큼의 곡식을 이자로 받게 되어 있었는데 1/2까지 더 받고, 줄 때도 모래, 겨 등을 섞어 적게 주었다. 관리들이 곡식 대신 돈으로 받아 착복하기도 했다. 이를 환정문란이라 한다.
삼정문란은 전정· 군정· 환정 셋의 문란을 합친 이름이다. 삼정문란은 1811년의 홍경래 난, 1862년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임술농민항쟁 등 19세기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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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세운 지 200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온 조선은 '붕당(당파) 정치'에 빠져 '부국 강병을 소홀히' 한 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작은따옴표로 인용된 내용이 원문임)
그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백여 년에 걸친 통일 전쟁을 끝낸 후 '정권의 안정을 위해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자신의 정복욕도 성취하고자 전력을 다해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세 파악을 목적으로 일본에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의견은 엇갈렸고, 조정이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는 정사의 보고를 무시하고, 부사의 의견을 따르게 되어 국방은 소홀하게 되었다.' 임금과 조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조식임진왜란 발발 얼마 전인 1555년(명종 10) 5월 왜구들이 70여 척의 배로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 영암, 강진에 침입해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을 포로로 잡아간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임진왜란 전 한일 관계' 부분은 이 사건에 대한 소개도 게시하고 있다. 몇 달 뒤인 10월, 왜구들이 만행 가담자들의 목을 베어 바치자 조선 조정은 그들을 용서하고, 무역선도 다섯 척 증가시켜 주었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