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반대편 어두움과 희망 내부에 웅크린 우울을 노래해온 허연 시인의 신작 <오십 미터>.
문학과지성사
외모는 물론, 풍기는 '작가적 향취'까지 임화와 박인환을 닮은 시인이 바로 허연(50)이다. 전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를 통해 빛이 아닌 그림자, 열락이 아닌 침잠, 희망의 배후에 자리한 어두움을 노래해온 그가 새로운 작품을 챙겨 들고 독자들 앞에 섰다. 신작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시를 쓰기 시작한 20대 중반부터 허연이 주목한 것은 '즐거움의 파편'이 아닌 인간의 삶 내·외부에 자리한 외로움과 고뇌였다. 지천명에 이른 그는 태생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어두움을 '죽음'이란 단어를 향해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예컨대 이런 시다.
'죽은 이의 이름을 휴대폰 주소록에서 읽는다. 나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어떤 것이니까. 신전의 묘비를 읽도록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위의 책 중 'Nile 407' 중 일부 현대를 숨쉬는 '산 자'들의 영역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휴대폰에서 그 옛날부터 거부할 수 없는 주문처럼 지속돼 온 '죽음'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그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을까? 당연지사 없다. 이른바 '한국의 주요일간지' 문화부장이란 직책이 주는 안락함과 안정도 '시인' 허연에겐 훈장이 아닌 일상이다. 그러니, 그는 다시 이렇게 노래한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 위의 책 중 '오십 미터' 중 일부
지상에서의 서러움을 넘어서려는 시어... 투명한 죽음 곁으로살아간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다. 인간과 세계를 향해 뻗은 촉수에 슬픔이 묻어나오지 않는 이들을 '시인'이라 칭했던 역사는 없다. 인류가 지구에서 그 삶을 영위해온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노력으로도 결코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그리움이 시인을 존재케 했다. 허연은 그걸 아는 사람이다. 허니, 시인인 그가 차안(此岸)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
그 숫자는 적지만 한국의 '좋은 시인' 대부분은 현세에서의 욕망을 눈 아래 둘 수밖에 없다. 허연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그는 지리멸렬한 차안에서 '빛나는 피안(彼岸)'을 향한 시의 촉수를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아래 인용하는 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옆집으로 이사 가듯 죽었다해가 길어졌고깨어진 기왓장 틈새로마지막 햇살이 잔인하게 빛났다구원을 위해 몰려왔던 자들은짐을 벗지 못한 채다시 산을 내려간다- 위의 책 중 '사십구재' 중 일부앞서 기자는 임화와 박인환이 그들의 곁에 두고 사랑했던(?) 죽음을 이야기했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존재의 절멸'에 다름 아닌 죽음. 그러나, 시인은 그 죽음조차도 삶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마주한 죽음은 슬픔이나 통곡이 아닌 말갛고 투명한 시적 재료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