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 충익사(곽재우 사당) 기념관의 게시물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에는 천생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정만진
그런데 경남 의령 충익사 기념관의 게시물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에는 천생산성이 빠져 있다. 대구 망우공원, (대구 달성군) 현풍 예연서원, 신도비, (경남) 창녕 화왕산성, 망우정, 기강 전적지, (경남) 의령 충익사, 현고수(북을 걸어놓고 두드리며 처음 의병을 모은 나무), 생가, 벽화산성, 정남진 전적지만 표시되어 있을 뿐, 천생산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추측하자면,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나타낸 게시물이기 때문에 빠졌거나, 아니면 천생산성은 큰 싸움이 벌어진 격전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된 듯하다. 후자라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승리(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고 갈파한 <손자병법>의 명언을 참고할 일이다. 천생산성에서 곽재우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격퇴했다. 이야말로 대단한 쾌승이다. 천생산성은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 중에서도 '가장 좋은 승리'의 모범을 보여준 뜻깊은 전승지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천생산성 미덕암 위, 곽재우 장군이 흑마를 세워두었을 법한 자리에 검은 말 동상을 세워두면 좋을 것이다. 아득한 산 아래에서, 임진왜란 때의 왜군처럼, 천생산 정상부를 쳐다보며 '저게 뭘까?' 하고 서로에게 묻고 답하는 재미, 이른바 '스토리텔링'은 그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흑마를 배경으로 찍은 기념 사진들 또한 천생산성을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입소문'의 몫을 감당해줄 터이다.
▲거대 바위들 사이에 돌을 쌓아 성곽을 구축한 기법을 잘 보여주는 천생산성
정만진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은 곽재우 장군이 흑마를 세워둔 채 왜적들을 속였다는 성벽 끝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 형식, 즉 험준한 암벽 사이를 돌로 이어 쌓은 모습도 보고 싶게 한다. 하지만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 산42-2번지는 천생산 정상 의 주소일 뿐, 천생산성의 전모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지침은 못 된다.
천생산은 해발 407m에 지나지 않는다.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천생산성은) 석벽(石壁, 암석 절벽)이 반을 넘고 천연으로 된 험한 곳'이라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사면에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 성이 되었다. 하늘(天)이 만든(生) 것 같다고 해서 천생(天生)산성이라 부른다.'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표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어째서 천생산을 '하늘이 만든 산'으로 여겼을까언중(言衆, 그 말을 사용하는 대중)이 오랜 세월을 두고 이 산을 천생산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천생산이라는 이름이 사회성을 얻은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이 산을 '하늘이 만든 산'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함부로 첫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실제로 천생산의 동쪽과 북쪽, 즉 천평면 신장리 방면은 온통 수직의 절벽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석벽이 반을 넘는다'는 표현 그대로, 동쪽과 북쪽 비탈을 걸어 천생산성으로 올라갈 마음은 애당초 먹지 않아야 한다.
▲천생산 동쪽의 가파르고 거친 비탈과 그 아래 낙동강이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풍경. 이 사진을 보면, 보통의 일반인은 이쪽으로 천생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을 버릴 것이다. 천생산의 북쪽도 가파르기는 동족과 마찬가지이다. 북쪽의 미덕암 일원은 천생산 중에서도 가장 험한 절벽을 보여준다. 미덕암 앞 안내판도 미덕암 일원을 '천생산 중에서도 천연으로 깎은 듯이 험준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내판은 곽재우 장군이 백마를 세워 두었다고 잘못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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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천생산성 답사는 북쪽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천생산성의 1km 수평 성곽을 확인할 수 있고, 산 정상부의 평평한 모습도 볼 수 있다. 남쪽에서 차를 이용하여 청룡사(구미시 천생산길 200)에 접근하면 성곽 바로 아래에 닿기 때문에 전쟁터로서의 산성을 답사하는 의의가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1km 수평 성곽도, 정상부의 평평한 지형도 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는 최고의 출발점은 장천면 신장2길 272, 마을 끝집 옆 빈터이자 천생산 첫 들머리이다. 물론 천생산 북쪽 천길 석벽을 오를 수는 없으므로 산자락을 타고 남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왼쪽의 산비탈과 오른쪽의 황무지 사이로 길은 줄곧 이어진다.
이윽고 길이 산 안으로 들어선다. 논밭이라고는 주위에 한뼘도 없는데 뜬금없이 연못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일본군들이 산성 아래에 고여 있는 지하수를 뽑아내려고 연못을 팠다더니 이게 바로 그 중의 하나로구나! 연못가에 서서 한참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놀랍게도 세모꼴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천생산 정상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천생산성의 참모습을 정확하게 바라볼 지점 꼭 찾아야
▲천생산성은 아무렇게나 올라서는 역사 답사가 되지 않는 유적지이다. 천생산성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산 정상부 지형이 평탄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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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이마다 다르지만 20분가량 더 올라가면 천생산성 정상부가 완벽하게 평평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조망 지점이 나타난다. 답사 출발 이전에 사진으로 보았던 장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감동이 정말 '밀물처럼' 밀려온다. 임진왜란 당시 산을 둘러쌌던 왜적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면서 아군들이 느껴던 희열도 이보다는 못했으리라!
가로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성곽 1km가 너무나 생생하게 보인다. 천생산성은 엄청난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정상부는 들판처럼 평평하다는 놀라운 사실이 눈으로 완벽하게 확인된다. 이제 성 안으로 들어가 산성 동쪽과 북쪽의 천연 절벽을 확인하고, 주로 서쪽 비탈을 따라가며 쌓여있는 성곽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곽재우 장군이 흑마를 세웠던 미덕암에 올라보면 천생산성 답사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
동쪽 절벽 위에 서서 멀리 북쪽 끝을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미덕암 위에 올라 제 나름의 멋진 자세를 뽐내고 있다. 그래! 이 찬 날씨에 이곳까지 올라 저렇게 천연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저들이야말로 의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성내 평지를 걸어 미덕암을 향해 나아간다.
▲천생산성은 성곽이 높을 까닭이 없다. 성곽 아래가 온통 절벽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의 동쪽과 북쪽은 천길 낭떠러지인 탓에 아예 성곽을 수축할 필요도 없었다.
정만진
천생산성 답사로 |
천생산성은 여정을 잘 잡아야 제대로 된 답사를 할 수 있는 역사 유적이다. (1) 출발 지점 : 구미시 장천면 신장2길 272 (산의 북쪽 지점) (2) 출발점에서 오른쪽으로, 산비탈과 버려진 농토 사이로 나 있는, 산의 서쪽 비탈을 타고 이어지는 등산로를 걷는다. 연못과 묘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보면 천생산성의 정상부가 반쯤 수평으로 느껴지고, 가로로 이어진 산성 성곽이 희끗희끗하게 보여 '저게 절벽인가? 성곽인가?' 가늠이 잘 안 된다. 묘소를 지나 왼쪽으로 간다. 등산객들이 매달아놓은 표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3) 고개에 닿는다. 왼쪽으로 가면 산성, 직진하면 천룡사로 간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이정표에 없는 오른쪽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20미터가량만 가서 뒤돌아보라. 천생산성의 정상부가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다. 사진을 찍는다. (4) 되돌아서 길을 따라 걸으면 산성 입구에 닿는다. 동쪽과 서쪽,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동쪽으로 가야 한다. 서쪽으로 가면, 올라오면서 쳐다볼 때 희끗희끗한 수평 실선으로 보였던 복원된 성곽을 볼 수 있지만 미덕암에 다녀온 후 내려오면서 보는 데 견줘 성곽 실감이 떨어진다. 미덕암에서부터 이곳까지 성곽이 내리막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산하면서 보아야 아찔한 느낌이 강렬하다. (5) 조금 올라가면 동쪽으로 낭떠러지가 펼쳐진 풍경을 보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표현을 떠올린다. 여기서부터 북쪽을 향해 미덕암까지 걸으면서 천생산성의 내부가 아주 평평하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한다. (6) 동쪽 낭떠러지 위를 따라 걷다가 중간쯤 가면 북쪽에 툭 튀어나온 절벽이 보인다. 미덕암이다. 미덕암 사진은 이곳에서 찍어야 실감이 난다. (7) 길 가운데 바위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곽재우 부대가 깃발을 꽂기 위해 판 것이다. (8) 산불 감시 초소, 천생산성 유래비, 제단이 나타난다. (9) 초소 앞에 세워져 있는 '천생산성에 대하여' 라는 안내판의 내용을 읽는다. (10) 미덕암에 올라 아득한 절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바라본다. 이곳에 서려 있는 흑마와 쌀 이야기를 떠 올려본다. (11) 초소 뒤편으로 가면 깃발 구멍이 많이 나 있다. (12) 산 서편을 감고 있는 성곽 위를 천천히 걸으며 답사한다. 암석과 암석 사이에 돌을 쌓아 성곽을 1km나 이은 독특한 축성술을 잘 감상해야 한다. (13) 천생산성의 전경을 잘 볼 수 있었던 (3)으로 돌아와 다시 전경을 감상한다. 실제 답사를 한 후 보는 풍경이기 때문에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14) 산길로서는 아주 평이하여 전혀 위험하지 않지만 그래도 천천히 걸어서 하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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