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 대사의 신라 멸망 유도 설화가 깃들어 있는 경주 봉황대
정만진
1592년 4월 13일, 제 1진의 왜장 소서행장이 700여 척의 배에 1만8700명의 장졸들을 거느리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15일, 첨사 정발(鄭撥)과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장렬히 순국하고 부산은 적의 손에 떨어졌다. 22일, 제대로 된 싸움 한번 없이 대구까지 무너졌고, 적들은 상주를 향해 거의 질주하다시피 북상했다.
이 소식이 김종무에게 전해졌다. (경남 함안) 사근도역에서 찰방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종무는 부랴부랴 (경북) 선산으로 올라와 가족들을 금오산 대혈(大穴, 도선굴)에 피신시켰다. 그리고는 단신으로 상주로 달려갔다. 그 날이 4월 23일.
이날 상주 북천변은 피바다가 되었다조정에서 내려보낸 순변사 이일(李鎰)은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고 없었다. 진중은 텅 비어 있었다. 김종무는 상주판관 권길(權吉, 1550-1592)과 함께 의병 800명 규합,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과 맞섰다. 그러나 중과부적에다 낙후된 무기로는 도저히 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이날 상주 북천변 백사장은 피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