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농촌마을
서형
2001년 1월 14일경 전남 고흥군에 있는 한 마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65세 할머니가 집 대나무밭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할머니는 예리한 물건으로 몇 차례 찔린 상태였다. 사건 현장에는 담배꽁초와 우산이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담배꽁초는 평소 알고 지내던 김태용(가명)이 피워서 버린 것이었고 우산 주인은 박용근(가명)이었다.
경찰은 피해자 행적을 추적했다. 1월 9일 오후 8시경 할머니는 자기 집에서 김태용, 박용근과 술을 마시고 놀았다. 할머니 집에서 나온 김태용과 박용근은 김철준(가명)이 운전하는 렌터카를 타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김철준은 먼저 김태용을 데려다주고 나서 박용근을 데려다줬다. 김태용과 박용근 모두 알리바이가 확보됐다. 렌터카를 운전한 김철준이 증인이었다.
경찰은 당시 할머니를 찌를 때 사용한 칼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자백을 받으면 직접증거인 칼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백을 이끌어내지도 못했고 칼도 찾지 못했다.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강남석 검사는 경찰 수사기록을 모조리 가져왔다. 검찰은 먼저 용의자 범죄경력을 조회했다. 박용근 기록에 전과가 있었다. 검찰은 광주지검 순천지청에 있는 당시 사건기록을 받았다. 판결문 내용을 보니 할머니를 죽인 수법과 같았다. 강남석 검사는 판결문을 제시하며 박용근을 추궁했고 결국 자백을 받았다. 렌터카를 운전했던 김철준도 검찰 조사에서 본인이 착각한 채 진술했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박용근은 렌터카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에 내렸다고 한다.
수사를 맡았던 검찰 관계자는 경찰 수사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당시 경찰 수사기록에는 판결문 같은 자료가 편철돼 있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 관계자가 쓴 수기를 보면 검찰은 사건 조사 전에 고흥경찰서 관계자를 불러 범인을 검거할 기회를 줬다. 하지만, 경찰은 다른 혐의점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경찰은 왜 이런 중요한 단서를 놓쳤을까. 2001년과 2009년 고흥판 '살인의 추억' 사건을 수사한 최관호(가명) 형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건을 기록한 검찰 수기를 읽은 최관호 형사는 강남석 검사를 먼저 칭찬했다. 자신은 그런 배짱 있는 검사와 일하는 게 좋았다고 했다. 해마다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나올 때마다 형사는 미제사건을 설명했다. 하지만, 사건에 관심을 보인 검사는 드물었다고 한다. '한 번 해보자'며 의욕을 보인 검사는 강남석뿐이었다.
형사 역시 검찰이 판결문을 입수한 점을 칭찬했다. 분명히 경찰이 놓친 증거였다. 경찰도 2001년 당시 박용근 범죄경력을 조회했다. 하지만, 전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검찰과 경찰이 쓰는 조회 시스템이 달랐기 때문이다. 최관호 형사는 특진이 걸린 사건을 조사하면서 전과를 알았다면 경찰이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경찰이 풀지 못한 강력사건을 검찰이 해결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검찰이 7월 30일 고흥 '살인의 추억' 사건 용의자를 구속하고 20일이 안 된 8월 18일, 순천경찰서는 백희정에 대한 강간과 강제추행 사건을 순천지청에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