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학습과정안의 일부. 점쟁이가 아닌 이상 학생의 반응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준수
'망했다. 그럼 그렇지.'
자책할 틈도 없었다. 기주가 등장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남자. 누구보다도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친구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칭찬해주면 선생님을 잘 따르지만 잠깐 내버려두면 소동을 감수해야 했다. 이날도 그랬다. 쓰기 활동을 하다가 모르는 게 생겼었나 보다. 좀 도와달라고 손을 들었는데 놓치고 말았다.
쿠당탕! 고개를 돌려 보니 기주가 짝꿍 상훈이와 뒹굴고 있었다. 모르는 내용을 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연을 나중에야 들었다. 달려갔다. 두 녀석 팔을 떼어 놓았다. 바짝 붙어서 작은 소리로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고 했다. 서로의 입장을 비교하고 상담할 틈도 없었다. 여전히 씩씩거리는 꼬마들을 말리는데 울고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무슨 선생질을 하겠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쨌든 수업을 마쳐야 했다. 숨 크게 쉬고 진도를 나갔다. 이즈음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 다른 수업을 보러 나가셨다. 마지막으로 활동3 차례가 되었다. 중심 문장과 뒷받침 문장을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는 게 핵심이었다. 예정된 과업 중 가장 난이도가 높아 꼼꼼한 관리가 필요했다. 할당된 시간은 10분.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교과서를 봐주고 있었다. 기주가 손을 들었다. 늦게 가면 또다시 난장판이 벌어질까 봐 얼른 반응했다. 그 사이 다른 아이들도 SOS를 요청했다.
'어쩌지. 기주를 벗어나면 더 큰 사달이 날 텐데!'
위기상황이었다. 아까의 해프닝을 경험해서였을까? 아니면 이대로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걸까? 엄마들이 움직였다. 의재 어머님이 자녀의 국어책을 도와주자 조용히 계시던 다른 분들도 용기를 내셨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선생님들이 퇴장한 상태라 눈치 볼 사람도 없었다. 갑자기 팀티칭 수업이 되어버렸다.
공동육아방처럼 엄마들과 그사이에 낀 신규 선생이 꼬맹이들을 다 같이 지도했다. 이미 교수학습과정안 대로 하는 수업은 물건너갔다. 계획안에 형광펜까지 치며 외웠던 대본은 잊기로 했다. 학습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상황에 맞게 응대했다. 틀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버리니 속 편했다. 활동3과 최종 퀴즈까지 시끌벅적하고 유쾌하게 마무리되었다. 학부모들은 불편한 손님이 아니었다. 부족한 선생을 측은지심으로 도우신 손길이 고마웠다.
학부모 공개수업 이후 힘을 좀 뺐다. 아주 천천히 변화가 있었다. 너무 초조해 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매년 공개수업을 3차례 이상 가졌지만 완전히 망한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 훌륭한 투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신참에게 필요한 건 힘 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