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철에 이어 대구 의병대장을 맡은 서사원은 정사철이 창건하여 강학하다가 임란 때 불탄 선사서당 자리에 선사재를 재건하여 평생의 강학 장소로 삼았는데 뒷날 후학들이 대구 두 번째 서원인 이강서원으로 발전시켰다.
정만진
과연 임진왜란은 '창졸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시기에 갑자기 일어난 것일까? 구본욱의 저서는 정사철이 '1592년 정월 자질(子姪, 후손)들에게 멀지않아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선조들의 묘소를 수축(修築, 고치고 쌓음)하게 하고 선영(先塋, 선조의 산소)에 제사를 지내며 크게 슬퍼하였다'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정사철의 글을 모아 후손들이 간행한 <임하실기> 중 '행장'에 나오는 표현이다.
임진왜란 발발 후 대구 지역 의병대장으로 추대되는 정사철
1592년 7월 6일 대구 의병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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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 정사철, 서사원 공사원(工事員) : 이주 유사(有司) : 이경원, 채선행 읍내: 용덕리 (항병장)하자호 / (유사) 주심언 북산리 김우형 / 서사진, 무태리 여빈주 / 류호 달지리 서득겸 / 박유문, 초동리 서사술 / 서사준 이동리 배익수, 채응홍 / 서행원 신서촌 설번 / 백시호 수성현: 대장겸 현내장(縣內將) 손처눌 / 유사 손탁 동면 (항병장) 곽대수 / (유사) 곽렴 남면 배기문 / 류창, 서면 조경 / 전길 북면 채몽연 / 박득인 해안현: 오면(五面) 도대장(都大將) 곽재겸 상항리 (항병장) 곽재명 / (유사) 전상현 동촌리 우순필 / 최인개, 서부리 최의 / 이사경 북촌 류요신 / 홍익, 서촌 민충보 / 배찬효 하빈현: 대장 겸 서면장 이종문 / 유사 정악 남면 (항병장) 정광천 / (유사) 곽대덕 동면 홍한 / 정용, 북면 박충윤 / 이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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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당시 대구는 '대구도호부'였다. 대구도호부는 중심가인 읍내, 읍내의 동쪽 일원인 해안현, 남쪽인 수성현, 서쪽인 하빈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남쪽으로 화원현도 있었지만 대구도호부가 아니라 성주목 소속이었다.
그래서 왜적들에 대항할 의병을 조직할 때에도 이 행정구역 편제에 따랐다. 선비들은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 모여 읍내 7개의 리(里)와 3개 현(縣)에 의병을 조직하기로 결의한다.
회의는 정사철을 (대구 전역의) 의병대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읍내와 해안현은 각 마을 및 현 단위로, 수성현과 하빈면은 대장(향병장)과 유사(有司, 실무 책임자)를 두었다. 다만 각 현에는 전체 지역을 관장하는 대장을 별도로 선임했다.
정사철은 6월 1일 아들 정광천을 팔공산에 보내어 서사원, 이주, 채응홍, 서행원, 이상문, 은복홍 등과 창의를 논의하게 하고, 또 손처눌, 채몽연, 전길과도 의견을 나누었다.
정사철은 전란 발발 무렵 대구 유림의 최고 지도자였다. 임진왜란 때 대구에서 창의한 의병들은 모두 명종 대와 선조 대의 대구 유림을 대표한 정사철, 전경창(全慶昌, 1532~1583), 채응린(蔡應麟, 1529~1584) 세 사람으로부터 배운 제자들이었는데, 1592년에는 정사철만 생존해 있었다. 그리하여 7월 6일 팔공산 부인사에서 대구 지역 의병, 즉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이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