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장에서 1970년 12월 대부대 작전에 참가했다. 치누크를 타고 정글 속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지요하
미국으로부터 받는 병장 수당은 155달러라고 했다. 그 금액에서 2/3를 국가에서 가져가고 1/3만 병사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국가에서 가져가는 금액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국가경제발전에 쓰인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전투수당 2/3을 국가에 바쳐 애국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 돈이 전부 국가로 가지 않고 일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계좌로 들어갈지 모른다는 말도 돌았지만, 그런 말을 공공연히 하진 못했다.
아무튼 나는 목숨 걸고 베트남 전장에 가서 애국을 했다. 전투수당 155달러 중 54달러만 받고 2/3을 금액을 국가에 바쳤으니, 그게 온전히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더라도, 피땀 흘려 애국을 한 셈이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6개월 동안 최전방에서 생활했다. 중동부 전선 철책선을 지키는 부대의 분대장 근무를 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하사가 맡아야 하는 분대장 근무를 하면서 남다른 애환을 겪기도 했는데, 그 애환을 바탕으로 <내 마음의 철책선>이라는 중편소설을 지어서 <한국소설> 2011년 11월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철책선에서 분대장 근무를 하면서 민족의 분단 현실을 절절히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노상 북한 땅을 바라보며 분단의 실체물인 철책선을 지키는 일에서 겪은 자괴감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비판적 시각이 결부될 터이므로, 자칫 좌파로 몰릴 위험도 있다.
충실히 군대생활을 했음에도, 전투수당 2/3을 국가에 바치며 애국했음에도, 최전방 철책선에서 감내했던 분단 현실에 대한 뼈아픔을 절절히 토로하지 못하는 것은 딜레마다. 자칫 통일지향의 좌파적 시각을 노출할 수 있으므로, 나는 애국자가 될 자신이 없다.
평범한 소시민의 한계나는 어언 60대 후반 세월에 이르도록 세금 체납도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위장전입이나 부동산투기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오종종하게 살아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철칙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온 셈이다.
글을 써서 버는 쥐꼬리만한 고료에도 어김없이 붙는 원천징수로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했고, 관청에서 세금고지서를 받으면 매번 납부 기일을 지키곤 했다. 교육공무원인 아내는 해마다 1월이면 연말정산을 하며 유리지갑임을 확인하곤 했다.
자동차를 몰다 보면 가끔 단속카메라에 찍히기도 하는데, 서민 등골 빼먹는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과태료를 한 번도 체납해본 적이 없다. 은행 창구 직원에게 속도위반 범칙금 통지서와 현금을 내밀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애국을 한다고 너스레를 떤 적도 있다.
나이 마흔에 결혼했을망정 두 아이를 얻어 잘 키웠고, 연세 아흔이 넘으신 노친을 잘 모시고 살면서 이런저런 단체들에 참여해 사회공동선을 위한 일들에도 함께하니, 나는 여러 모로 애국적인 삶을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애국시민임을 자부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