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분도 신부의 가족 등이 덕적도 성당에서 찍은 기념사진.
서재송 제공
최분도 신부는 1932년 1월 7일 미국 미네소타 주의 농촌에서 5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사제 세 명과 수녀 다섯 명을 배출한, 보기 드문 천주교 집안이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건 그의 형(2남) 덕분이다.
그의 형은 1956년 8월 한강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두 소년을 구출한 뒤 안타깝게 익사했다. 당시 군인이었다. 최 신부의 어머니는 최 신부가 형의 유지(遺志: 한국인에 대한 사랑)를 이어가기를 희망했다. 당시 신학교 철학과 4학년이던 최 신부는 신학과에 편입했고, 사제 서품도 받았다. 그리고 27세인 1959년 메리놀 외방선교회를 통해 배를 40일 동안 타고 한국으로 왔다. 그가 한국으로 온 사연은 당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는 1962년부터 연평도, 1967년부터 덕적도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서해 낙도에서 가난과 질병 등으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을 돌본 것이다.
그는 질병에 시달리는 섬사람들을 위해 낡은 미군 함정을 인수, 병원선으로 개조해 성모 마리아의 애칭인 '바다의 별'호로 명명하고 진료에 나섰다. 지금 초고속정으로도 1시간 이상을 운행해야 육지(인천)에 닿을 수 있는 섬 주민들의 생활여건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최 신부는 '바다의 별'호로 덕적군도를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봤다. 덕적군도엔 덕적도를 비롯해 문갑도·울도·지도·백야도·굴업도·소야도·이작도 등, 유·무인도 43개로 이뤄져있다.
최 신부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복자유베드로병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인천인물 100인(다인아트, <경인일보>)'을 보면, 복자유베드로병원은 연간 입원환자가 5500여 명, 외래환자가 1만2000여 명에 달했다.
또한 최 신부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덕적도 주민을 위해 미군의 지원을 받아 100kw 자가 발전기 두 대를 설치했다. 손수 철근과 시멘트로 전지를 만들었고, 집집마다 전등을 설치해 불을 밝혔다.
영세한 어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23톤급 어선 세 척을 구입, 무상으로 기증해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게 했고, 김 양식을 보급해 생계에 큰 도움을 줬다. 섬에 상수도를 설치하고 유치원을 만들었다.
혼혈아·고아·장애인을 전국에서 데려다 돌봤다. 치료가 필요하거나 부모가 필요한 아이를 미국으로 입양 보내기도 했다. 혼혈아 1000여 명의 입양을 자신의 고향을 중심으로 주선했다. 이런 선행으로 덕적도 주민 상당수가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가 됐다.
최 신부의 선행은 파도를 타고 뭍에도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6월,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2급)을 수여했다. 외국인이 받은 최고 훈장인 셈이다. 그의 어머니 이벨린 여사에게도 국민훈장 석류장(3급)이 수여됐다. 이벨린 여사는 미국에서 독지가를 많이 모아 물심양면으로 아들의 선행을 지원했다. 육영수 여사는 최 신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노고를 치하했다. 1976년 9월, 인천시도 최 신부에게 명예시민증을 전달했다.
독재정권에 당당히 맞선 신부최 신부는 섬 생활 14년을 한 뒤 인천 동구 송림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정의와 인권을 지키는 사제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독재정권의 폭압 등으로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했다.
그는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학생·지식인과 함께했고,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탄압을 받을 때는 피난처를 제공했다. 당시 정권은 전담 형사를 배치해 최 신부를 감시했고, 비자 유효기간 만료 전일까지 연장 승인을 하지 않는 등의 탄압을 가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그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이후 부평으로 온 최 신부는 고아와 혼혈아를 위한 봉사활동에 매진했다. 그의 사제관은 아이들이 뛰며 뒹굴고 하던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혼혈아나 장애아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미국 등으로 입양을 주선했다. '성원선시오의 집'을 만들어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최분도 신부님의 헌신과 사랑이 전파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