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리온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상훈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
- 정상훈 선생님은 한국인 의사로서는 최초로 에볼라 유행 지역에 들어갔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치사율이 90%에 육박한다고 알려졌던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시에라리온에 가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으셨나요? "먼저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제 아내에, 아이도 둘이나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죠. 2014년 11월 시에라리온의 카일라훈에 처음 들어갔을 무렵, 어린아이에게 무언가 먹여주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분명히 개인보호장구를 몇 차례에 걸쳐서 입은 상태였거든요. 에이프런을 하고, 고글도 하고, 장갑은 이중으로 꼈고요. 그랬는데도 아이를 안았을 때, 저와 그 아이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아이의 땀이 저한테 그대로 묻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에볼라를 퇴치하러 갈 생각을 하게 되었던가? 저 자신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충동 때문이었습니다. 에볼라는 재작년부터 창궐하기 시작해서, 2014년 3월 공식화된 질병입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그때 처음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소식을 쭉 듣고 있었죠. 여름이 지나고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에볼라 관련 뉴스가 많이 나왔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인이 에볼라에 걸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시끄러워졌던 것인데요.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무렵부터,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만을 택하지는 않잖아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제가 이왕에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가치 있는 선택에 떳떳해지기 위해서 가기로 했습니다."
- 에볼라뿐만 아니라, 과거에 아르메니아에서 다제내성결핵을 치료했고, 레바논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을 진료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활동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제가 의사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은 굉장히 순진한 생각에서였습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닥에 있는 분들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돕고 싶다는 생각. 그랬기에 제 커다란 보람은, 삶의 밑바닥에 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왔습니다. 저는 오로지 저 자신이나 가족이 잘살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거든요. 제가 이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제가 가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가 사람 된 도리를 했다는 보람이 가장 컸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완쾌된 분들을 볼 때 느끼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다제내성결핵 같은 경우 약값만 해도 일 년에 수백만 원에 이르거든요. 그런데 그 돈이 없어 아르메니아 정부가 치료를 못 해주는 상황이었죠. 아르메니아는 굉장히 가난한 나라거든요. 결핵이 대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병이라, 환자들 스스로 치료하기도 힘들었고요. 다행히 국경없는의사회가 치료하면서 완쾌된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또 시에라리온에서는 3남매가 입원해 있었는데, 그 부모님은 다 돌아가신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3남매가 다 완쾌되어서, 내가 태어나서 어떤 목숨을 살렸구나 하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기 마련인 정의로운 활동 이면의, 개인적인 회의나 고통은 없었나요? "사실 제가 느낀 보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제가 어떤 분들을 살렸다고 말했지만, 살리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보통 결핵은 6개월 정도 약을 먹는데, 이 아르메니아 다제내성결핵 같은 경우에는 2년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치료 프로그램을 완전히 마쳐서 완쾌된 분이 50%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50%는 치료를 했지만 돌아가신 경우도 많았고, 또 치료를 중간에 포기하신 경우도 많았습니다.
약을 안 드시면 죽는다고 설명해도, "나는 치료를 중단하고 돈 벌러 다시 러시아로 가야겠다"고 하는 분들을 보았을 때 제가 의사로서 해드릴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죠. 그런 무력감이 있었고요. 또 시에라리온에서도 의료진 개입 후 치사율이 90%에서 50%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분이 제가 머무는 동안에도 시체가 되어 돌아나갔습니다.
에볼라 같은 경우 특히 끔찍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생명이 귀하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한정된 자원이 있을 때 임산부와 어린아이를 먼저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사망률은 끝까지 90% 이상, 거의 100%에 가까웠어요. 임산부와 어린아이들은 면역력이 굉장히 약한 집단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의 죽음을 지켜만 봐야 하는 현실은, 저뿐만 아니라 에볼라 창궐 지역에 들어갔던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들 모두가 겪어야 하는 심리적 고통이었습니다."
- 제가 듣기로는, 에볼라와 관련해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파견한 인원이 지금껏 수백 명에 달하는데요. 한국에서 파견한 인원은 2명뿐이라고 알고 있어서, 국제적인 평균에 비하면 많이 낮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에라리온에서의 일화가 떠오르는데요. 제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파견되다 보니, 국경없는 의사회 차원의 홍보를 위해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랬더니 외국인 활동가들이 '네 인터뷰 완벽했다'며 농담을 던지더라고요. 제가 한국말로 인터뷰했으니 그들은 당연히 알아들을 리가 없었죠.
그런데 저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실 국경없는의사회가 에볼라 대응을 위해 파견한 70여 번째 해외활동가일 뿐이었으니까요. 다만 한국인으로는 최초이다 보니 우리나라에 돌아온 뒤에도 인터뷰를 했던 것이고요. 지적하셨던 것처럼 우리나라 국력에 비하면 파견 인원이 적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에볼라로는 한국에서 지금까지 딱 2명만이 활동가로 갔으니까요.
그 이유는 뭘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복지제도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외국인 의료인들의 경우 몇 달 유급휴가나 심지어 1년, 2년 무급휴가를 내는 게 굉장히 쉽습니다. 시에라리온에서 본 네덜란드 분은, 두 달 치 유급 휴가를 내고 오셨더라고요. 그게 부러웠습니다. 그만큼 유럽은 기본적으로 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의사들도 그런 제도를 잘 누리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의사가 아니라 심지어 일반 노동자들도 장기 휴가가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특히 의사들 같은 전문직에서는 거의 불가능해요. 병원에 근무하는 분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개원한 분들도 그만큼 병원을 닫으면 망하는 거죠.
그러니까 에볼라 사태에서만 한국 의사들이 적었던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안타깝게도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는 한국 의사분들 자체가 아직 많지 않아요. 그러니 시에라리온에 갈 만한 조건이 되는 분들도 적었던 거죠. 우리나라의 근무 조건, 노동 환경은 기본적으로 열악하고, 장시간 노동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할 의사는 앞으로도 계속 부족할 것입니다."
"자원활동만으로는 결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 그런데도 선생님은 시에라리온으로 향할 수 있었잖아요?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일상은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합니다."저는 어떻게 보면 조금 독특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 역시 저랑 비슷하세요. 정규적인 근무지를 가지고 계시지 않은 것이죠. 쉽게 말하면 알바 의사를 하고 있달까요?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저 같은 경우는 대략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일을 합니다.
의사들은 대개 의사 면허를 딴 뒤에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되는데요. 저는 그 과정을 거치다가 뜻한 바가 있어 그만두고, 행동하는의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는 활동가가 제 직업이 된 것 같아요. 그렇기에 다른 의사들처럼 넉넉한 형편은 아닙니다. 저도 가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단기 대진을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고요. 근무를 안 하는 시간에는 방송통신대학에도 다니고, 도서관에 다니면서 활동가로서 일하기도 합니다. 사실 시간을 자유롭게, 저 스스로 관리하기를 원했고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선생님이 대학에 들어가 시작한 행동하는 의사회는 80년대의 운동 단체들과는 대비되는, 장애인과 소수자로부터 출발한 단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구호단체에서 활동하는 길도 있었을 텐데, 학생 시절부터 그런 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두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의약분업 사태가 있었죠. 의사들이 거의 총파업을 한 2000년 초유의 사태였는데요. 그때 저는 기본적으로 의약분업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대다수가 반대했었죠. 제 주위에는 의약분업에 찬성하는 의사들도 있었고 잘 모르겠다는 의사들, 즉 정책적으로 의사들이 완전히 틀리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의사들 내부의 논의는 굉장히 폭력적이었습니다. 다른 의견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었죠. 그래서 심지어는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한 의사 선생님께 다른 의사들이 집단으로 찾아가서 폭언을 퍼붓는 일도 있었고요. 온라인상이든 오프라인상이든, 당시 투쟁본부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의사들은 집단으로 매장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이 명백한 집단 이기주의로 보였습니다. 국민과 환자들보다는 의사 직종의 가치를 앞세우는 활동이며, 이것은 젊은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나눔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단체를 만들게 된 것과 관련이 있는데요. 과거 의사단체들의 활동은 정책 중심이었습니다. 정책을 만들어서 그것을 다른 정당이나 정치단체들이 제안한 방식으로 투쟁을 만드는, 제한적인 활동이었던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런 정책 운동은 많은 의사가 참가하기에 한계가 있었거든요. 정책을 짤 능력이 있는 분들만 할 수 있으니까요.
제 주위에 있었던 많은 동료, 후배 의사들은 그보다는 직접 행동을 하고, 주류 의료계와는 다른 목소리와 활동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할 수 있는 동시에 사회의 어려운 분들과 직접 만나는 활동을 고민하다 보니, 나눔 운동과 자원활동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