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사람들 인권기행에 참가한 청소년과 청년들이 미수습자 간담회를 마치고, 팽목항에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 인권기행
지난 1월 29, 30, 31일 인권기행 '사람들'을 다녀왔다. 처음 같이 가보자는 친구의 제안을 받았을 때는 솔직히 조금 주저했다. 홍보 포스터의 '세월호'라는 세 글자를 보자 부끄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면서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글자 앞에서 지쳐버리고, 외면하려는 나 자신을 보는 것도 참 괴로웠다.
출발일 바로 전까지도 나는 몇 번이고 '가지 말까?' 고민하며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 인권기행 '사람들' 캠프는 마냥 기쁘고, 즐거운 공간이 분명 아닐 것이다. 거대한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사람들의 삶은 보나마나 화가 나고, 슬픈 이야기일 것이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하는 미안함과 알고도 행동하지 않는 비겁한 내 모습을 마주할 때의 창피함, 약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 가는데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이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모두 나를 괴롭게 할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캠프를 가는 걸까? 나는 왜 이 괴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는 걸까?
나는 왜 이 캠프를 가는 걸까그 이유는 바로 여기 광주와 팽목에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인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18 민주묘지에는 80년 당시 광주에 살고 있었던 시민들이 묻혀 있다. 어느 곳이나 그러하듯 평범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광주의 가족들, 이웃들, 친구들, 동료가 그해 5월에 목숨을 잃었다.
헌혈하고 오는 길에 계엄군에게 잡혀 죽은 고등학생, 온몸이 터질 때까지 맞아 죽은 장애인 노동자,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찾으러 나왔다가 만삭 상태로 맞아 죽은 신부... 그 소중한 목숨은 왜 '열사'라는 이름으로 땅에 묻혀야 했나.
눈앞에서 딸의 골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봐야 했던 어머니, 총을 든 시민군이었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쏠 수 없었다'는 518 생존자의 말이, 어제 길에서 반갑게 인사한 동네 이웃이 다음 날 주검으로 돌아오는 그 비참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님을 알았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저들만의 인권이 아니라 나의 인권이 되었다.
광주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을 만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다. 인권이 없는 사람이어서 당한 게 아니다. 저들도 나와 똑같이 인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러하듯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사람답게 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 또한 언제든지 저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그 것이 우리가 '내가 광주의 시민군이었다면', '내가 발포명령을 받은 계엄군이었다면'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팽목항이라는 공간도 그렇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600일이 넘도록 배 안에서 나오지 못한 9명의 사람들. 5000만 국민 중에 9명은 매우 작은 숫자이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 9명이 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9명이 남겨진 그 배를 올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을 뿐이니까.
두 번째 팽목항, 혼란스러웠다팽목항에 온 것은 두 번째였다. 1년 전 내가 처음으로 팽목항에 갔을 때도 나는 이 캠프에 왔을 때처럼 도망칠까 하는 마음이었다. 솔직히 분노와 슬픔을 겪기 싫었다. 세상엔 재밌는 게 넘치는데 굳이 그들의 절절한 사연을 찾아보고 또 울고 그러기가 지겨웠었다. 또 분노와 슬픔 뒤에 찾아올 무력감이 무서웠고, 갔다 와서도 행동하지 않을 미래의 내 모습을 예측하며 외면하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직접 뵙고 나니 그분들은 우리에게 슬픔과 동정심, 무력감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전과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찾아와준 사람들에게 와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응원을 해주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위로를 받고 왔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배는 여전히 바다에 있고, 미수습된 9명의 가족들은 2년 전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여전히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고통이 얼마나 될지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미수습자 간담회가 시작되었고,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상처를 받았다. 은화 어머니의 말이 나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고, 솔직히 나를 공격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참 혼란스러웠다. 1년 전과는 다르게 감사 인사와 위로의 말보다 외면해버리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말을 격앙된 목소리로 전하는 은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지금 흘리는 이 눈물이 가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만약 세월호에 내 가족이 타고 있었고, 2년 동안 저 뱃속에서 나오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나 또한 저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날의 경험을 통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타인에 대한 미움으로 변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았다. 그리고 그 미움이 약자에게로 흐르기가 얼마나 쉬운지 절감했다. 내가 그랬다. 은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분들을 외면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고, 판단이었지만 어느새 '저 사람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은화 어머니가 우리에게 해준 말은 결코 심한 말이 아니었다. 또 나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생긴 불편하고, 화나는 감정을 두고 '세월호 희생자 때문이야'라고 생각할 뻔했다.
나는 먼저 물었어야 했다. 도대체 누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 평범한 사람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딸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세월호 희생자로 만들었는가? 누가 이들을 존재하게 하였는가? 나의 분노와 불편함은 '희생자'가 아니라 '희생자를 만든 이'에게 흘렀어야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탔을 때 은화 어머니가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와주어서 정말로 고맙습니다'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순간 안도의 감정이 들었는데, 희생자가 오히려 내 감정을 돌보아주길 바라는 내 마음이 참 간사했다.
언젠가 은화 어머니를 만나고 온 한 고등학생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이 나를 위로해주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이 마음에 참 와 닿았다. 남을 탓하는 것은 나를 지키는 방법이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내가 느끼는 분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니 묵혀있던 괴로움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저들의 인권이 무너지면 나의 인권도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