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청 인근인 교동의 한 철물점 가게 안에 남아 있는 대구향교 우물 흔적.
정만진
대구향교가 처음 건립된 곳은 중구 교동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침탈로 불타버렸고, 종전 후인 1599년(선조 32) 재건될 때는 현재의 달성공원 근처에 배치되었다.
그 후 1605년(선조 38), 달성 주변은 '불길한 징조가 있어(대구향교 안내판의 설명)' 재차 교동으로 왔고, 1625년(인조 3) 명륜당이 복원되었다.
대구향교는 1932년에 현재 위치로 왔다. 향교 안의 안내판은 '시가지를 확장함에 따라 지금 자리로' 이건(移建)되었다고 설명한다. 대구역 앞을 지나 동인네거리로 가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남산동 위치에 자리를 잡은 대구향교가 본래의 교동 향교 터에 남긴 것은 우물 흔적뿐이다. (전국적으로 향교가 있었던 마을들에는 '교동, 교리' 식의 이름이 붙어 있다.)
대성전, 명륜당, 추녀, 용마루, 공포 |
대성전 : 대성(大成)이 공자를 가리키므로 대성전은 공자의 집(殿), 즉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그에 비해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를 모시는 집이다. 명륜당 : 공부하는 집 전묘후학(前廟後學) : 제사(廟)를 지내는 사당(대성전)이 앞(前)에 있고, 공부(學)하는 명륜당이 뒤(後)에 위치 좌학우묘(左學後廟) : 명륜당이 왼(左)쪽, 대성전이 오른(右)쪽에 위치 추녀 : 네모지고 끝이 번쩍 들린, 처마의 네 귀에 있는 큰 서까래 용(龍)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공포 :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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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시대의 대구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 구조였다. 그에 비해 지금은 명륜당이 왼쪽에 있고 대성전이 오른쪽에 있는 좌학우묘(左學右廟) 형식을 취하고 있다. 출입문인 외삼문은 동쪽으로 난 높은 계단 위에 있다.
대구향교 대성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구조의 대성전 건물은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옆면 벽이 용마루까지 삼각형을 이루는 맞배지붕을 보여준다. 이 대성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둥 위만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한 화려한 다포식 건축 기법에 있다. 대성전이 이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래서 대구향교의 대성전은 대구시 문화재자료 1호로 등록되었다.
1592년 4월 21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이 대구를 침탈한다.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7일만에 적들은 대구읍성에 불을 질렀다. 전란 발발 한 해 전인 1591년에 완공된 대구읍성은 축성을 마친 지 겨우 1년만에 납작하게 뭉개졌다. 대구부사 윤방(尹昉)과 함께 고성동(古城洞) 일대에 대구읍성을 쌓느라 피땀을 흘린 (경북) 선산, 군위, 인동 백성들의 고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읍성을 불사른 일본군은 머물 곳이 마땅하지 않자 대구향교에 본부 진영을 꾸렸다. 의병장 우배선의 편지 등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 <월곡실기(月谷實記)>의 '복병등상순영장(伏兵等上巡營狀)'에 따르면 일본군들은 '향교의 성전(聖殿, 대성전) 위에 높은 누대를 세워 네 문을 통해 멀리 살펴보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항상 새로 지은 집에 머물면서 말을 침실 근처에 별도로 두'었으며, 우두머리의 숙소는 '노왜(奴倭, 일본군)가 숙직'을 하며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