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내자동에 위치한 서울지방경찰청
유영호
종교교회 네거리에서 백운동천의 북서쪽 종로구 내자동에는 현재 '서울지방경찰청'이 위치해 있다. 이곳에 최초로 고층건물이 들어선 것은 1935년 일본 미쿠니(三國)석탄회사의 사원아파트로 건설된 4층 건물이었다. 이것은 이에 앞서 1930년 회현동에 건설된 3층짜리 같은 회사의 사원아파트와 함께 우리나라 아파트의 시원을 열었다.
(참고로 이 두 아파트와 비슷한 시기인 1932년 조선주택영단에서 건설한 '도요타(豊田)아파트'(현 충정아파트, 서대문구 충정로3가 250-5)는 일반인 상대의 임대아파트로 시초일 뿐만 아니라 1979년 도로확장으로 일부 잘려나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현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초기 아파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충정아파트는 6.25전쟁 중에 인민군의 재판소로도 사용됐다.)
한편 내자동 미쿠니아파트는 해방 후 '내자호텔'이란 이름으로 주한미군에게 무상공여되어 줄곧 주한미군의 숙소로 사용됐다. 이런 역사를 간직하고 있던 이곳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79년 10.26사태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된 곳은 다름 아닌 관제요정이었던 '궁정동 안가'(현 무궁화동산, 종로구 궁정동55-3)였고, 그 현장에는 젊은 여성 둘이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 훗날 김재규의 재판에서 드러난 여러 사실 가운데 하나가 약 200명쯤 되는 여성들이 박정희에게 호출을 받았을 때, 대통령에게 가기 전 기다리던 곳이 대부분 바로 이 내자호텔 1층 커피숍이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이렇게 한국 현대사의 일부를 증언하고 있던 유서 깊은 곳이었지만 1990년 사직터널이 2개에서 3개로 늘어나는 도로확장과 더불어 사라졌다. 그런데 당시 도로확장을 위한 내자호텔 반환 협상에서 주한미군의 강한 압박이 있었다는 것이 '용산이전 합의각서관련 대책 필요'라는 안기부 문건 공개로 밝혀졌다.
나아가 91년 당시 반기문 미주국장이 용산미군기지 이전 비용 전액을 부담하기로 한 90년 합의·양해각서의 법적 효력을 인정한 '소파합동위원회 각서'에 서명하게 된 이유도 드러났다. (관련 기사:
미군 협박에 굴복한 반기문의 '91년 사인')
"(외무부 안에서는) 88.7 '주한 미군숙소로 무상대여한 내자호텔을 반환받는 조건으로 48억 원을 지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맞서온 유광석 미주국안보과장이 미군 측의 로비로 전보(일본연수)된 바 있어, 반 국장도 같은 사례로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자조적인 분위기마저 산견(散見)되고 있다." - 91년 5월 안기부 문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