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사가 타던 통영상선으로,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군조련도병풍의 일부를 칠천량해전공원전시관이 복사하여 게시해둔 것이다.
정만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1597년 1월 23일 "왜추(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오는 날짜를 가르쳐주면서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치면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가토를 참수하라는 임금과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고 출전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왜추보다도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는 편안하게 누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고 개탄한다. 드디어 선조는 1월 27일 "그런 사람(이순신)은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 와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이순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도 천명한다.
정탁 등의 구명 운동으로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으로 교체된다. 하지만 본래 수군 단독 출전론을 펼쳐왔던 원균도 통제사가 된 뒤 생각을 바꾼다. 원균은 1597년 4월 19일 "지금은 춘삼월이라 비가 오지 않는 까닭에 땅이 굳어 있어 말을 달리고 싸움을 하기에 매우 좋은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육군과 수군을 크게 일으켜 한판의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하고 장계를 보내는 등 이순신과 똑같은 주장을 고집한다.
정탁(鄭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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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중종 21)에 태어나 1605년(선조38)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도승지, 대사헌, 강원도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했다. 본관은 청주(淸州).
정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좌찬성으로 있으면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1594년에는 곽재우·김덕령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고, 그 이듬해에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이미 72세의 노령이었음에도 직접 싸움터에 나아가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 했다. 선조가 그의 연로함을 지적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종전을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이 해 3월 옥에 갇혀 있던 이순신을 구해내는 데 앞장섰다. 이순신과 원균이 주장한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신뢰했던 정탁은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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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을 빨리 출전시키라는 선조의 독촉이 도원수 권율에게 하달된다. 그동안 원균은 통제사가 된 지 다섯 달이나 되었는데도 전혀 출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권율은 원균에게 계속 출전을 미루면 군법의 적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조의 의중을 전한다. 결국 6월 18일, 원균은 가덕도 앞까지 진출한다.
승패가 확연하지 않은 전투를 마친 원균은 한산도 통제영(삼도수군통제사가 근무하는 군영)으로 돌아온다. 권율이 다시 원균을 불러 '빨리 재출전 하라'고 지시한다. 원균은 여전히 수륙 병진론(육군과 수군이 함께 나아가 일본군의 왜성과 수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술)을 주장하며 권율의 지시를 거부한다. 원균은 무수한 장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율에게 매질을 당한다.
7월 5일, 마침내 원균은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부산포 앞바다로 출정한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우 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한 채 가덕도, 서생포(울산) 등 육지 쪽으로 밀려난다. 가토가 주둔한 서생포왜성 등 뭍에서 기다리던 일본군들은 지쳐서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조선 수군들을 무참히 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