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카페에서 만난 혜인씨"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제안자 용혜인씨를 경희대학교 청운관 카페에서 만났다.
김영길
"사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용혜인씨의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였다. 하나는 자기 삶의 변화를 상상하지 못했다는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304명이 죽은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다는 의미였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혜인씨는 '다른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두게 됐지만 당시 먹고 살길을 찾아 한창 공무원시험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혜인씨는 안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등학교 때까지 꼬박 20년을 살았다. 세월호가 잠기며 동생의 친구가, 중학교 때 선생님이 함께 사라졌다. 세월호 참사는 그저 '안타까운 남의 일' 같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참사 이후 2년 가까이 지난 최근도 혜인씨는 '잊지 않기' 위한 활동들을 해나가고 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이후 줄곧 '세월호'를 우리 사회의 화두로서 던져왔다. 지난해 4월 서울에서 있었던 토크콘서트 <사람들>에선 기획과 사회를 맡았다.
용혜인씨는 세월호 가족과 함께 밀양 주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LG·SK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대에 섰고 300명의 시민을 만났다. 토크콘서트는 대구와 부산으로 이어졌다. 그는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들과 세월호 유가족이 함께하는 인권기행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하던 2014년, 대학 신입생들과 얘기하면서 혜인씨는 그들이 갖는 어떤 '죄책감'에 놀랐다고 한다.
"저는 활동반경이 비교적 자유로울 때 세월호 참사를 경험했고, 나름대로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등을 하면서 직접 행동을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학생들은 공부를 이유로 다시 수업·야자(야간자율학습)·학원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더라고요. 언론이나 유가족에게 들어 우린 익숙한 이야기들도 '잘 몰랐다'며 놀랐다고 하고요."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은 2014년 당시 단원고 희생자들과 같은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다.
"적어도 동갑내기였던 학생들이 대학에 오는 올해까진 신입생들과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앞으로도 이런 활동을 이어갈 것이냐'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제법 무거웠다. '304명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식상한 이유"였다. '가만히 있으라'는 화두는 기억을 위한 메시지이기도 했지만, 사람의 존재와 삶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되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어요. 사람들은 자꾸 죽는데, 목숨보다 이윤이 더 중요한 사회잖아요. 이제 그 죽음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식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세대가 다시 진지하게 '인권', 기본적인 것, 인간의 목숨과 삶에 대해, 누가 그걸 막으려고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같은 활동을 기획할 때부터 혜인씨가 이어온 고민은 '혼자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개인의 삶이 바뀌는 것을 넘어서 그 변화들이 모여서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 자신이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기억만으로는 참사의 원인을 바꿀 수 없으니까요. 어떻게 개인들의 다른 삶이,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는 것으로 한 번 더 바뀔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에요. 제가 만드는 활동들은 같이 해나가는 친구들과 그런 고민을 나눈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청년 문제에 진짜 청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