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전세매물 분포도.지난해 2월 말 ~ 3월 초, 전세보증금 3000만 원 이상의 서울시 5평(16.5㎡) 원룸 전세 매물 분포도. 색깔이 짙은 동네에 매물이 많다는 의미다.
오마이뉴스
이제 동생과 나는 수도권에서의 네 번째 집을 구하고 있다. 피터팬 카페(방 구하기 카페)와 동네 부동산 정도밖에 몰랐던 이전과 달리, 최근 들어 많아진 부동산 중개 앱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집 쇼핑'은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어서, 이런저런 집을 구경하며 더 좋은 집을 고르는 노하우를 축적하는 중이다. 또, 인천을 마지막으로 전세를 포기했다. 전세를 구하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서울로의 진입을 시도하면서 우리가 꿈꾸는 조건들과 전세금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저 월세의 가이드라인을 정해 가능한 한 그 안에서 최선을 택할 뿐이다.
감당 가능해 보이는 가격을 참고해 방을 구경하다 보면 사소한 절망도 쌓여간다. 우리의 조건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애초부터 서울 도심으로의 진입이란 언감생심 바랄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1인 가구, 그중에서도 취업준비생과 사회초년생, 즉 '집에서의 삶' 대신 '방에서의 삶'을 강요받는 이들을 위한 곳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주요 대학 인근과 신림, 봉천 등을 아우르는 고시촌, 영등포와 신길의 중국어 간판이 빽빽한 어느 외국까지. 방이란 그저 머리를 누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 이상의 모든 삶은 문 바깥에 위탁한다.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공원의 벤치 말고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문 바깥말이다. 문 바깥의 삶을 외면하더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은 머리 누일 공간을 위해 매달 30에서 40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갖춰진 5~7평의 원룸들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말이란, 매일 누적되는 내일에 대한 피로감과 아직 포기하지 못한 희망 어디쯤에 위치한 주문 같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이 좀 더 많이 남아있는 건 아마도 동생과 내가 두 사람 몫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 몫의 희망을 합치는 것은 포기를 늦추는 효과가 있다. 그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인지 아닌지는 제쳐놓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두 사람 이상이 같이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에서의 삶'을 선택하면 도심에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야만 한다. 만약 여전히 도심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집이 얼마나 돈을 우습게 만드는지 느끼게 된다. 멀지도 않은 오늘(16일) 낮의 일이었다.
우리는 재개발 인간일 수밖에 없을까영등포와 신길 중간에 위치한 집은 애초에 보려 했던 집이 아니었다. 보려고 찾아갔던 집이 조금 전 팔렸기 때문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옆 중개사를 찾아갔다가 보게 된 곳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소 영등포지회의 협회장을 맡고 있는 업자 아줌마는 주인에게 잘 이야기해 조건을 맞춰주겠다고 했다.
보증금 3000과 월세 30을 최대치로 이야기한 우리는 이미 패를 내보였으므로 잠자코 길을 따라 들어갔다. 좁은 골목의 3층 건물엔 반지층과 2층, 3층이 열을 지어 초라했다. '반지층은 아니겠지'란 알량한 기대가 충족된 다음 순간 2층의 문이 열렸고, 정면에 보인 것은 한 눈에도 낡은 싱크대였다.
설거지할 공간 하나, 그릇을 놓을 곳 하나. 기린마냥 목이 뻗은 스테인리스 수도꼭지에는 냉수와 온수가 나누어진 손잡이의 빨간색, 파란색이 흐릿했다. 오른쪽에 위치한 작은 방은 양팔을 벌린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세탁기와 냉장고를 여기에 놔야 한다고 했다. 왼쪽의 큰 방은 3.5x3m쯤 돼 보였지만 골방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공실이 된 지 오래됐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창가에 달린 작은 테라스의 창문이 깨져 있었다. 그 와중에 광주 출신의 살가운 아줌마는 우리의 조건을 맞춰주겠다는 의미로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여기 전세 7000이야."돈은 참 우스운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그 방의 후줄근함을 수긍했지만, 전세 7000에는 수긍하지 못했다. 수긍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영등포 공원의 잘 닦인 우레탄 도로를 걸어 내려오며 깊은 데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한 소득이 있었다는 한숨이었다.
서울의 주소지를 탐하는 한, 우리는 계속 재개발 인간일 수밖에 없다, 뭐 그런 소득. 부천도, 인천도, 그리고 나만 살았던 아현도 모두 재개발 지역에 속하는 곳이었다.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가용 자산이 우리를 재개발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우리는 또 떠날 것이 분명한 곳에 자리를 잡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집에서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비단 '1인분의 삶'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곳에 머물러 살고자 하는 정주의식이 유물이 되어버린 시대에, '집에서의 삶'을 그리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
"재개발 인간인 주제에" 영등포의 부동산에 걸려 있던 재개발 지구의 지도가 비웃었다.
지도에 대고 속으로 물었다. 재개발 인간들은 이곳을 떠나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재개발된 다른 지역들의 재개발 인간들, 주변부의 인간들, 잉여 인간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지.
안전장치를 얻어본 적 없는 사람들, 어디로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