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우호관에 게시되어 있는 <부산진성 전투도> 복사본.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14일 부산진성을 공격, 임진왜란 첫 전투가 벌어졌다. 첨사 정발을 위시한 3천여 조선 군, 민이 2만에 가까운데다 총까지 가진 일본군에 맞서 수성을 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4시간만에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의 백성들은 물론 개와 고양이까지 남김없이 다 죽였다. 그런데 이 전투는 소서행장의 군대가 치렀다. 사야가는 가등청정의 선봉장이었던 관계로 18일이 되어서야 부산에 상륙했으므로 부산진성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아마 사야가는 이 전투에서 드러난 일본군의 잔학상을 보고 더욱 조선 귀화를 결심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한일우호관
그래서 사야가는 '(3) 부산항에 도착하자 마자' 부하 3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했다. 사야가가 조선인들을 살상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보낸 <강화서>(講和書)에 잘 밝혀져 있다.
사야가는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하며 자신의 귀화가 목숨을 구하기 위한 투항이 아님을 당당하게 강조했다.
"제가 지금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 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사야가의 조선 귀화 이유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 29권을 새삼 읽어보게 한다. 이 책은 '임진왜란 중 왜군이 조선에 투항한 직접적 동기'를 '왜군 진영에 기근이 극심했고, 조선 정부가 항왜(降倭, 조선에 항복한 왜군)를 후대한다는 소문이 왜군 진영에 전파된 것, 일본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고 본국으로 철수했을 때에 겪어야 할 생활고에 대한 걱정'의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야가는 목숨 부지 걱정을 한 적이 없다하지만 사야가의 귀화는 세 가지 중 어느 경우와도 무관하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마자' 조선에 귀화했으니 굶주림에 시달렸을 리 없고, 사야가 본인이 최초의 귀화 인물인즉 조선이 항왜를 우대한다는 소문은 아예 생겨나기도 전이었다. 개전 초기는 일본군들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각각 몇 시간만에 가볍게 점령해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던 때이므로 패전 후 귀국했을 때의 생활고를 걱정할 시점도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은 아직 항왜 수용을 위한 대책이 없었고 적의 투항을 불신하여 투항자가 오면 무조건 살해하겠다는 것이 정론이었던 반면 명군은 항왜를 받아들여 후대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군이 처음 투항한 곳은 조선 진영이 아니라 명군 진영이었다'는 <신편 한국사>의 증언과, '부산항에 도착하자 마자' 사야가가 명군도 아닌 조선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을 찾았다는 기록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
<효유서>와 <강화서>에 이미 천명하였지만, 김충선은 자신이 지은 '술회가'에서도 '남쪽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면서 '조선의 좋은 문물 한번 보기 원했는데 하늘이 그 뜻 알고 귀신이 감동하여 가등청정이 어리고(당시 22세) 무식한 나를 선봉장 삼았네' 하고 술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충선의 글을 모아 간행된 <모하당문집>의 '녹촌지'에도 그가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이' 조선에 귀화한 까닭이 거듭 밝혀져 있다.
'내가 이 나라에 귀화한 것은 잘되기를 구함도 아니요, 명예를 취함도 아니다. 대개 처음부터 두 가지 계획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요순 삼대의 유풍을 사모하여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함이요, 또 하나는 자손을 예의의 나라에 남겨서 대대로 예의의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라.'
▲'달성 한일 우호관' 뒤편 300미터 산중에 있는 김충선의 묘소
정만진
<신편 한국사> 29권은 '조선에서는 물론이며 일본의 유학자들도 풍신수길이 "명분 없는 전쟁을 도발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풍신수길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웅심, 대명무역 확대, 해외 발전 또는 봉건영주들의 세력 약화를 위한 것 등을 들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또 다른 <한국사>의 12권도 '① 풍신수길의 개인적인 심리적 공명심과 영웅심 등을 근간으로 하는 것. ② 일본의 조선이나 명에 대한 무역과 결부된 해외 발전에 두는 것. ③ 풍신수길이 일본 국내의 여러 봉건영주, 특히 신흥세력인 구주의 영주(領主)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해외 원정'을 임진왜란 발발의 원인으로 적시한다.
그런데 '모하당 김충선'은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 또 하나의 까닭을 말해준다. 그가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부하 3천여 명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했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사야가도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 및 일부 일본 사학들과 동일한 인식, 즉 '임진왜란은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 '세 가지 이유'사야가의 귀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그 자신이 문화국 조선에서 살 수 있기를 어릴 때부터 염원했다. 둘째, 자식들을 예의 나라에서 예를 아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셋째, 일본의 조선 침략에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생각한 평화주의 사상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전쟁 중 적국에 붙은 인물의 유례는 그리 드물지 않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나라의 권력을 차지했던 남생은 동생들과 암투에서 밀리자 당나라에 붙어 조국 고구려의 멸망에 크게 기여(?)한 뒤 적국에서 높은 벼슬까지 한다. 따라서 남생은 일신상의 욕심을 위해 조국을 버린, 말 그대로 배신자일 뿐이다.
▲김충선을 제향하기 위해 1794년 세워진 녹동서원은 영조와 정조 때 조선 유림들이 뜻을 모아 임금에게 건의한 끝에 건립되었다. 김충선이 본래 일본인이었고 문인이라기 보다는 무장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그만큼 조선 선비들이 김충선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정만진
그에 견주면 사야가는 차원이 다르다. 임진왜란은 아무런 명분도 없는 전쟁이었다. 1592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들은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 아메리카인디언의 99%를 학살하여 2000만 명이던 그들을 20만 명만 생존하게 만들고, 1500년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8000만 본토인들을 불과 50년 뒤인 1550년에 단 1000만 명만 남게 만든 유럽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흉폭한 야만인들이었다.
게르하르트 슈타군은 <전쟁과 평화>를 통해 "전쟁은 전염병처럼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이나 사회집단이 의도적으로 부추기고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인간소외의 가장 단적인 주범 전쟁, 그것도 명분없는 전쟁은 조국이 일으키는 것일지라도 반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행동하는 양심'은 때로 조국도 배신해야 한다. 사야가는 정권 차원의 국가보다 인류 전체의 공동체를 위해 한 몸 던지는 것이 사람의 도(道)라는 가르침을 역사에 새긴 진정한 위인이다.
녹동서원 일원 답사 순서 |
대구광역시 달성군 우록길 218(우록리 515) 일원의 김충선 장군 유적지에 도착,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맨 먼저 충절관을 보게 된다. 가장 왼쪽에 서 있는 건물로, 예전에는 기념관이었지만 지금은 강연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충절관은 대체로 문이 잠겨있기 때문에 일반 답사객은 들어갈 수가 없다.
답사객은 (1) 한일우호관(가장 오른쪽의 현대식 건물)부터 둘러본다. 실제로도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김충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다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2) 한일우호관 왼쪽의 녹동서원(강당), 녹동사(사당), 신도비 등을 둘러본다. (3) 우호관에서 뒤로 300미터 가량 산을 오르면 김충선 장군 묘소가 있다. 본래는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 산길이었는데 지금은 산책로를 닦고 손잡이와 다리까지 설치되어 있는데다 숲그늘이 좋아 걷기에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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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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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선봉장, '조선 장군 김충선'이 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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