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국방부장관 청문회를 앞둔 김병관 후보자가 군에서 자살로 처리된 이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퇴 촉구 기자회견.
고상만
그렇게 출근했던 나는 이후 2년 1개월 동안 김광진 의원과 함께 군 인권 개선과 관련한 여러 일을 했다. 물론 아직도 가야할 길은 구불구불 하지만 군 의문사를 비롯한 인권 문제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김광진 의원과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2년 1개월간 있었던 이 일에 대한 성과와 한계, 그리고 우리가 해결해야할 군 사망사고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관련한 이야기를 기사로 쓰기로 생각했다. 7개의 꼭지로 나눠 그동안 김광진 의원실에서 군 사망사고 유족과 함께 해 온 발자취를 많은 분들에게 전하려 한다. 이것이 앞으로 들어설 제20대 대한민국 국회가 이어가야 할 중요한 인권 과제이기 때문이다.
첫 단추는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인권운동을 하면서 종종 언론과 인터뷰를 한다. 그럴 때면 기자들이 늘 빼놓지 않고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어떤 계기로 군 의문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것.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있다. 바로 1998년, 판문점에서 의문사한 한 육사 장교의 이름이다.
1998년 5월 15일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로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사망했으나 군 당국이 '자살'로 일방 처리하여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들어보니 정말 의아했다. 나는 의문을 제기하는 그 아버지의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의문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때 내가 만난 아버지가 1998년 2월 24일 판문점에서 의문사한 고 김훈 중위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이었다.
그리고 이후 김훈 중위 사건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쭈글쭈글한 주름 가득한 80대 할머니부터 50대 초반의 아주머니까지. 또 절망과 우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내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내가 어찌할 수 없다"며 눈물짓는 아버지까지 연일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랬다. 의무복무를 위해 군에 입대한 아들을 잃었으나 그 억울함을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한 채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왔던 군 사망사고 유족들이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그 죽음이 사람의 죽음이 아닌 '개죽음'이라는 참혹한 단어로 불리던 피해자들. 그렇게 해서 지난 18년 전인 1998년, 나는 대한민국에 이처럼 많은 군 의문사 피해 유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후 나는 이러한 군 의문사 피해 유족의 염원인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관련법률 제정을 위해 싸웠다. 글로 쓰고, 방송에서 말하고, 또 거리에서 유족과 함께 국방부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권한이 없는 싸움은 한계가 있었다. 세상이 변하면서 조금씩 변했지만, 여전히 '자살로 처리된' 군인을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국방부가 자살로 사인을 규명하는 방식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었다. 국방부 헌병대는 과거 군인이 사망할 경우 '누가 방아쇠를 당겼고, 누가 목에 줄을 매었느냐'를 기준으로 사망 원인을 결론 내렸다. 예를 들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고, 자기가 스스로 목에 줄을 매면 자살로 결론내리는 방식이 군 헌병대 수사다.
하지만 유족은, 아니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이 억울한 일을 '똑같이 당해보면' 이러한 판단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금방 알게 된다. 간단하다. 헌병대는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으나 자살이 맞다고 결론내리지만 유족은 다르다. 실제로 사망한 군인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 해도, '그렇게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된 수사다.
지난 2014년 고참들에게 맞아죽은 윤 일병이 견디다, 견디다 참을 수 없어 맞아 죽기 전날, 스스로 목을 매었다면 군 헌병대 수사 방식에서는 응당 자살로 처리된다. 이런 방식의 군 헌병대 수사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니 누가 원통해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처럼 잘못된 군 헌병대 수사 방식을 바꾸고 그 피해자들의 명예를 국가가 책임지고 회복시켜달라는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었다. 여러 개로 흩어져 있던 군 사망사고 피해자 유족 단체를 하나로 묶는 일이었다. 확인해 보니 2013년 당시 이런 단체가 다섯 개로 흩어져 제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국방부를 이길 수 없다. 이 끔찍한 비극을 당하기 전까지 그저 평범한 사람 중 한명이었던 이 분들이 갑자기 어떻게 싸울까. 그저 억울하니까 유족 단체에 가입하여 싸우는 것뿐인데 그렇게 작은 역량조차도 모래알처럼 흩어졌으니 제대로 싸운다면 그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특히 국방부 입장에서는 이처럼 분열된 유족 단체가 내심 고마웠을 것이다. 대표성이 없으니 더욱 그랬다. 예를 들어 다섯 개 단체 중 한 곳이 결의를 하고 국방부 앞에서 장관 면담을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럴 때 국방부 입장은 편하다. "단체가 다섯 개나 있는데 어느 한 단체의 요구만으로 장관 면담을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며 거부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다섯 개로 흩어진 군 사망사고 유족 단체를 하나로 묶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유족 분들에게 일일이 연락하여 가지고 있는 유족들의 연락처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방식으로 한 분, 한 분의 유족 전화번호와 주소를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전화와 주소로 문자 메시지와 우편물을 보냈다. 군 사망사고 희생자를 위한 명예회복 싸움을 '함께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2013년 5월 24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원이 주최하는 군 의문사 피해 유족의 명예회복 촉구 행사가 국회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군대에 아들을 보낸 죄인입니다'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날 행사는 김광진 국회의원 주관했으며 유승민, 진성준 등 여야 국회의원이 주최자로 참여했다.
이날 행사에서 유족들은 그동안 혼자만 간직하던 자신의 아들과 남편, 그리고 남동생의 영정을 들고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국회를 찾을 때마다 '귀찮은 악성 민원인'처럼 핍박만 받아오던 군 사망사고 유족들이 그동안의 한과 눈물을 쏟아내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당당히 촉구했다. 그렇게 해서 흩어진 유족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었다.
예우없이 죽어간 군인,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