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운 유적최고운 유적까지 200여미터
최홍대
예전에 경상남도에 갔을 때 최치원의 흔적을 만나본 기억이 나는데 그 흔적이 이곳 보령에도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된 것이다. 진골 귀족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와 기득권의 한계는 신라를 안으로 부터 붕괴시키고 있었다.
신라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올리면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이는 진골귀족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최고운 유적은 이제 200여미터를 남기고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최치원이 한반도를 유람하게 된 것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면서 부터이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에서의 괴리는 결국 최치원을 은퇴의 길로 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