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군공책' 중 '사노 기총'의 전공에 관한 기록 부분
정만진
누리집의 평가를 좀 더 실감나게 확인하기 위해 '의병군공책'에 나오는 '사노 기총'의 전과 부분을 원문대로 읽어보자. 앞에서는 '사노 기총 21'로 종합하여 제시했지만 원문은 '사노 기총, 사살 18, 작살 3, 임진년(1592) 11월 19일 화원대접전(花園大接戰, 대구 달성군 화원읍 일원에서 벌인 큰 전투), 11월 28일 대구야작(夜斫, 대구에서 밤에 벌인 칼싸움), 12월 10일 감물천전(甘勿川戰, 김천 감물천 싸움)' 식으로 표현돼 있다.
사노 기총 부분의 원문은 이어 '계사년(1593) 1월 14일 대구추격(追擊, 따라가며 공격), 3월 11일 조암대전(祖岩大戰, 대구 달서구 조암동에서 벌인 큰 전투), 4월 22일 대구추격, 5월 13일 대구하래시추격(下來時追擊, 대구로 내려올 때 기습), 5월 5일 대구야작, 5월 11일 대구야작' 하고 계속된다.
전투 월일, 장소, 전투 방식까지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유일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군)들의 전공 보고서'라는 평가를 얻은 것이다.
보물 1334-2호인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교지(교첩)>은 '월곡 우배선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에 관한 것'이다.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이고, 교첩은 왕이 5품 이하의 관리를 임명할 때 발급하는 사령장이다.
선무원종공신 |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공신을 책봉한다. 그런데 1604년 6월 24일에 처음으로 확정된 공신 명단 104명에 의병은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한다. 선조가 자신과 함께 압록강까지 도망갔던 사람들을 주로 공신에 임명한 탓이다. 선조는 명나라와 외교를 담당하는 대신들, 그리고 옆에서 자신을 보좌한 사람들이 제일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시 24명, 왕의 말을 끄는 이마(理馬) 6명 등이 포함한 첫 공신 명단에 의병은 한 명도 넣지 않았다.
선조는 지방의 장수들이 잘못해서 임진왜란 때 나라가 곤욕을 치렀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발발에 대한 대비, 군사 전략의 수립과 운용, 인재 등용과 적재적소 배치 등 모든 분야에서 무능력을 드러냈던 선조 자신과 대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공신 책봉에 백성들과 무장들의 비난이 쇄도하자 선조는 할 수 없이 1605년 4월 공신을 추가(원종)로 지정하게 된다. 이를 원종공신이라 한다.
전란 중 일어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공신은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으로 대별된다. 선조와 함께 압록강까지 도망갔던 자들을 임금을 호위했다고 해서 호성(扈聖)공신이라 하고, 적과 직접 싸운 사람들을 선무(宣武)공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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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12점은 교첩 2점·교지 8점·추증교지 2점로 이뤄져 있다. 교지는 선조가 우배선을 1593년 5월 합천군수로 임명한 것에서부터 1605년 4월 경상좌도수군 우후(虞侯, 부수사)에 임명한 것까지 8점이다. 추증교지 2점은 1603년 2월 우배선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됨으로써 그의 부친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그의 모친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한 것이다. 교첩은 우배선을 1593년 2월과 3월에 각각 승진시킨 사령장들이다.
작은 의병 부대로 엄청난 적 '척살'월곡역사박물관의 '월곡'은 임진왜란 의병장 우배선의 호를 딴 명칭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우배선은) 성주 화원현에서 태어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화원과 대구 일원을 중심으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조정으로부터 의병 활동의 포상으로 합천군수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604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면서 '이들이 올린 전공은 참살 63명·사살 604명·작살 110명으로 작은 의병부대의 전과로는 엄청난 수'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