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후 첫 작품인 농촌 마당극 <호미풀이>
우금치
당시 우금치는 전국 농촌을 다니며 농민과 함께했다. 낮에는 논두렁과 시장통에서 농민의 마음을 풀어주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는 마당극을 공연했다. 밤이면 낮에 만난 그들의 사연을 덧붙여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창립 후 첫 작품인 농촌 마당극 <호미풀이>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후속작 <아줌마 만세>도 빚에 시달리는 농촌 현실을 해학과 춤, 소리로 엮었다. 지금까지도 농촌 마당극 연출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다. 70여 회 초청공연으로 우금치를 전국 수준의 마당극패 반열에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잘 만들어진 작품은 관객이 알아보기 마련이다. 민족예술상(민족예술인총연합), 전국민족극한마당 최우수작품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후 풍자와 해학의 소재가 다양화됐다. 작품도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필자가 좋아하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우리 신화 이야기>는 당금애기, 삼신할망, 북두칠성 이야기 등 한국의 고전소설과 설화를 현대감각으로 재구성했다. 가족마당극 <쪽빛황혼>은 국립극장 야외 마당극 공연 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한 기록을 남겼다.
젊은이가 노인이 되는 과정, 노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우리 고유의 가락을 가미해 형상화했다.
취재 현장에서 접한 우금치의 역량은 한마디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역의 새로운 축제 문화를 창조하기도 했다. 1999년부터 우금치가 마을 주민과 어울려 만든 <산내 공주말 디딜방아 뱅이>, <무수동 산신제>는 해당 지역의 대보름행사로 깊이 뿌리내렸다. 매년 계족산에서 치르는 무제도 지역 단오 축제로 정착했다.
돈벌이에 쏠린 축제 문화를 공동체를 복원하는 놀이로 뒤바꿔 놓은 것이다.
'세월호 집회' 현장에서 우금치와 만나다2014년 5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한 달째 되는 날. 대전도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 날 서대전 시민공원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제는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넋여'(상여)의 등장으로 시작됐다. 넋여를 메고 온 이들은 우금치 단원이었다. 넋여에 매달린 하얀 종이가 바람에 흔들렸다. 무대 앞에는 큼지막한 연꽃송이 속에 서글픈 아이들의 얼굴이 담긴 그림이 내걸렸다. 연꽃이 뿌리 내린 곳은 부패한 우리 사회다.
우금치 배우들은 몸짓으로 노래로 바닷속에 갇힌 아이들의 넋을 불러 모았다. 어딘가에 맺혀 있던 슬픈 멍울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시민들도 흐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두 시간 가까운 행사가 훌쩍 마무리됐다.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시민들은 대전역 서광장까지 1.8km를 행진했다. '잊지 않겠다'고 외쳤다. <거위의 꿈>을 합창했다.
한참 뒤에서야 뒷얘기를 들었다. 행사 준비에서부터 끝까지 우금치가 주된 역할을 했다는 것을. 그런데도 이름을 내세우기 꺼렸다는 것도.
앞서 우금치는 참사 직후인 5월 1일, 대전에서 처음으로 희생자추모위령제 '미안합니다'를 주관했다. 추모공연은 물론 준비위 구성부터 기금모금, 진행 등 행사 전반을 주도했다. 1주기 추모제 때도 열 일을 제쳐 놓고 시민들 앞에 섰다. 우금치 사람들의 마음결이 그대로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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