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뭐고?> 표지
삶창
비가 안 와서 / 노은 마르고 / 드래 가서 오지도 안는 영감 때무네 / 마음이 단다 / 하느님이 비를 주쓰면 조겠는데 / 비를 안 주니 / 콩 모종 들개 모종 해야 하는데 / 무러서 땡땡 마음도 가물다 (김기선 <마른 땅>)
참 따뜻하다 / 감나무밭 김을 멘다 // 꽃다지는 노랑꽃을 뽐내고 / 냉이꽃은 흰꽃을 뽐내고 / 된장꽃은 보라색으로 뽐내고 (김숙이 <밭 김매기>)경상도 칠곡 시골자락에서 사는 할머니 여든아홉 분이 쓴 시를 그러모은 <시가 뭐고?>(삶창, 2015)를 읽습니다. 책이름에도 붙듯이, 시골 할매는 "시가 뭐고?" 하고 묻습니다.
시를 쓰라고 하니 시라고 하는 글을 써 보지만, 할매들 스스로 시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면서 쓰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골 할매는 '할매 나이'에 이르고도 한참이 지난 오늘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글을 익혔습니다. 예순이든 일흔이든 여든이든, 이런 늘그막에 한글을 처음으로 익혔지요.
이는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시골 할매는 예순이나 일흔이나 여든이라는 나이에 이르도록 '한글로 된 책'은 읽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글로 된 신문'조차 읽은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재미있지요. 시골 할매가 한글을 익힌 적이 없어서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는 어떻게 했을까요? 사람 이름도 읽지 못하셨을 텐데 그야말로 선거를 해야 할 적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감꽃이 피었다가 하얗게 떨어지면 / 지푸라기 홀겨메어 한층 두층 뀌다보면 / 목걸이 만들고 옛날 그 시절 생각난다 / 감은 어머니의 둥지에서 영양분을 흠북 먹으면서 / 잘 큰다 가을 돼면 즐경을 이루고 (박태분 <감나무>)택배 주소도 쓸 줄 몰라 / 우체국 여직원 손 빌렸다. / 용기 내어 내 손으로 / 주소를 써 갔더니 / 여직원 둘이서 의아한 표정 (김옥순 <고마운 한글 공부>)시를 배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글조차 배운 적이 없고, 책을 배운 적도 없는 할매한테는 문학이라고 하는 글도 처음입니다.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도 시골 할매한테는 아무것이 아니기도 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시골 할매한테는 이녁 딸아들이랑 이녁 손자 이름이 대수롭고 사랑스러우며 가슴에 남지만,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들 이름은 안 대수롭고 안 사랑스러우며 가슴에 안 남지요.
그렇지만 이 시골 할매들이 시를 씁니다. 처음으로 한글을 익히고, 처음으로 연필을 쥐면서, 처음으로 할매들 이야기를 이녁 손으로 스스로 씁니다. 이녁 이야기를 입으로 읊어서 지식인이나 연구원이 녹음기로 받아서 따로 옮겨서 나오는 글이 아니라, 늙은 할매가 스스로 연필을 쥐고 스스로 이녁 이야기를 시라고 하는 얼거리로 찬찬히 빚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