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열린 '의무경찰 집회 동원 헌법소원인단 모집 및 감시단 운영' 기자회견에서 군인권센터 관계자가 감시단 활동에 사용할 손바닥 스티커를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를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다. 글의 요지가 '의경 가지 마라'인데, 나는 의경 출신이다. "너는 갔으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가지 말라고 하느냐?"는 반문이 들어 올 수 있다. 또한,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친구들의 뒤통수를 '후리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 같은 상황이 더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의경에 복무하던 당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스트레스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의경이 되면 얻을 수 있는 장점들만을 떠올렸던 순진함은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줬다. 집회 참가자를 향한 혐오를 키우는 구조 아래서 그걸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힘겨웠다. 제대 이후로도 그 당시 어지럽혀진 가치관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과거로 돌아가 의경 지원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계속 들었다.
집회·시위를 혐오하게 하는 의경부대지난 2011년 6월 22일, 난 소위 '폭력시위'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내가 속한 부대는 충남 아산 유성기업 노사분규 현장에 투입되었다. 상황은 격렬했다. 쇠파이프를 든 노조와 방패를 든 의경부대는 시위대와 정면으로 대치해 있었다.
충돌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노조의 쇠파이프를 맞고 주위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졌고, 내가 속한 부대의 대오는 곧 무너졌다. 당시 노조와 경찰이 충돌하여 약 150여 명 가량의 부상자가 속출했는데, 그 부상자의 대다수는 같은 소대, 중대 동료들이었다. 나 역시도 노조원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오른쪽 팔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그땐 내가 부대에 전입한 지 약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처음 겪는 격한 시위에 많이 당황했다. 눈에 보이는 격렬한 상황 말고도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 것은 또 있었다. 활동하고 계시는 노조원분들이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이기에 성숙한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물리적 충돌을 겪고 난 후에는 "어른이라고 생각한 분들이 어떻게 아들뻘인 의경들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경찰서 형사과에서 피해자 신분으로 조사받고, 피해보상까지 받으니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하지만 내가 든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틈틈이 그 현장과 관련된 보도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제야 어떤 내막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유성기업에선 사측의 직장폐쇄와 용역을 동원한 노조파괴와 같은 부당한 행위가 계속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계속해서 그들을 방조하고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22일 당일 새벽 무장한 용역들이 무방비상태의 조합원 23명을 집단폭행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수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 제기하는 조합원들을 연행했다. 노조가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안 건 부대 내에서 나 혼자뿐이었다. 부대 밖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유성기업 파업을 '연봉 7천만 원 받는 근로자들의 불법파업'이라며 엄정한 대처를 주문하고 나섰다. 언론은 그걸 그대로 받아쓰면서 파업을 비판했고 공권력 행사를 부추기고 있었다. 부대 내에선 언론을 제한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처럼 직접 관련 정보를 찾아보지 않는다면 사건의 내막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