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취소 해프닝, 북한은 중국에 목매는 나라 아니다

[게릴라 칼럼] 중국을 바라보는 북한의 불신, 그 역사

등록 2015.12.17 10:48수정 2015.12.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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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만든 '북한판 걸그룹' 모란봉악단이 9일 북한 평양에서 베이징을 향해 출발하기 직전(사진 위)과 12일 베이징에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사진 아래)의 표정 차이가 뚜렷하다. 이들은 12일 베이징 첫 공연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갑자기 취소해 여러 분석을 낳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만든 '북한판 걸그룹' 모란봉악단이 9일 북한 평양에서 베이징을 향해 출발하기 직전(사진 위)과 12일 베이징에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사진 아래)의 표정 차이가 뚜렷하다. 이들은 12일 베이징 첫 공연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갑자기 취소해 여러 분석을 낳고 있다. ⓒ 연합뉴스


북한의 두 음악단체가 베이징 공연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두 단체 중 하나인 조선인민군 공훈국가합창단(공훈합창단)은 조선인민군협주단 소속의 남성 합창단이었다가 1998년 독립단체로 변신한 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또 다른 단체인 모란봉악단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로 2012년 창립됐다. 두 단체는 12일~14일로 예정된 베이징 공연을 사전에 전격 취소했다.

음악단체의 공연 취소에 정치적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일성 가문의 정치홍보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두 음악단체가 개입된 일이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이 사건이 북중관계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두 단체가 공연을 취소한 이유는 공연 내용에 대한 중국 측의 이의 제기 때문이다. 그 이의 제기를 수용할 수 없어 공연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측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은 주로 무대 배경화면 때문인 듯하다.

그동안 공훈합창단과 모란봉악단의 북한 내 공연에서는,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체라고 주장하고 미국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주장하는 은하 3호가 발사되는 장면이 배경화면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은하 3호에는, 북한은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고 미국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광명성 3호가 탑재되어 있었다.

베이징 공연 첫날로 예정된 12일은 북한이 2012년 12월 12일 은하 3호를 발사한 지 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두 단체가 베이징 공연의 배경화면으로 은하 3호 발사 장면을 사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 공연,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안보리 결의 무시한다는 인상 줘

북한의 광명성 3호 발사에 맞서 미국은 유엔을 움직여 안보리 제재 결의안을 만들었다. 그것이 2013년 1월 22일 안보리 결의 제2087호다. 두 음악단체가 은하 3호 발사 장면을 베이징에서 보여준다면,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안보리 결의를 무시한다는 인상이 조성될 수도 있다. 


중국은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서는 미국과의 대결을 불사할 듯 행동하지만, 이해관계가 절박하지 않은 사안에서는 가급적 미국의 입장을 존중하고 있다. 중국정부 입장에서는 미국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공연 내용이 베이징에서 상연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중국정부가 공연을 취소한 것은 아니다. 취소한 쪽은 북한 측이다. 중국은 공연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했고 북한은 그것을 거절하고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a  광명성 3호의 발사체인 은하 3호.

광명성 3호의 발사체인 은하 3호.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표면상으로는 은하 3호 발사 등이 문제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에는 중국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오랫동안 누적된 중국에 대한 불신이 다소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이 사건을 통해 겉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런 불신은 김일성도 품었고 김정일도 품었다. 김정은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번 사건을 김정은의 성격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것은 김일성 가문의 대(對)중국 정서를 반영하는 사건이다.

북한의 대중 경제협력, 우리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아 

북한은 당연히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원하지만, 자국의 자존심을 훼손하면서까지 또는 중국의 비위를 맞추면서까지 그것을 만들려 하지는 않는다. 아니, 중국의 경제지원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북한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협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견고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미국·중국·일본에 쩔쩔매는 것은 이 나라들과의 경제협력이 없으면 여러 가지로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에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은 양국 사이에 그런 절절한 협력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로 중국에 신세를 지고 있다면, 이번 같은 사건도 쉽게 생기기 힘들 것이다.

지금도 종종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발동하지만, 북한은 그런 제재를 한국전쟁 발발 3일 뒤부터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 침공을 개시하자, 미국 정부는 3일 뒤 북한에 대해 수출통제법을 제정했다.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는 그 뒤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중국과 구소련으로부터 어느 정도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미국의 압박이 상존하는 상황 속에서 북한은 자기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용인하지 않는 수단까지 구사했다.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중국에 대해 굳이 빌빌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도와주면 좋지만 안 도와줘도 할 수 없다는 식인 것이다.

북한이 중국에 대해 불신을 품은 데는 아무래도 1960년대 전반기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이 그때 본격적으로 싹튼 것이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은 자국의 세계적 지도력에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이지만,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제압하지 못했다. 북한과의 대결은 공식적으로는 무승부(휴전협정)로 끝났다. 거기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 제3의 비동맹 노선을 천명했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유럽에서는 경제통합운동이 전개되면서 대미 의존도가 약화됐다. 유럽통합운동의 초기 형태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유럽경제공동체(EEC)·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1952년에서 1958년 사이에 발족된 것이다. 미국의 최대 동맹권인 서유럽에서 대미 의존도를 떨어뜨리는 경제통합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만큼은 영향력을 보존하고자 한미일 삼각동맹의 구축을 시도한다. 1953년 한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1960년에는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으로 업그레이드시키면서 자위대가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통해 주일미군과 공동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했다. 또 1965년에는 상호 반목하는 한국과 일본이 한일기본조약을 맺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 이로써, 약한 수준이나마 미국을 매개로 한미일 삼각동맹이 형성됐다.

미국이 한미일 삼각동맹을 결성할 조짐이 보이자, 마음이 가장 급한 쪽은 북한이었다. 한미일 삼각동맹과 가장 가까이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이 가장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1961년 한 해 동안에 중국 및 소련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한 것이다. 이로써 양자 동맹의 형태로 북중소 삼각동맹이 간접적으로 결성됐다.

북중소 삼각동맹은 1961년, 한미일 삼각동맹은 1965년 완성

한미일 삼각동맹은 약한 수준의 동맹체였다. 한·일 간에 군사동맹이 아닌 기본조약이 체결되는 선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북중소 삼각동맹은 높은 수준의 동맹체였다. 거기다가 북중소 삼각동맹은 1961년 완성된 데 비해 한미일 삼각동맹은 1965년 완성됐다. 이런 형식적 측면만 보면 1960년대 전반에 우위를 차지한 쪽은 북중소 3국이었다.

하지만, 외형과 달리 북중소 삼각동맹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유명무실이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얼마 안 있어 생겨났기 때문이다.

북중소 삼각동맹이 간접적으로 결성된 이듬해인 1962년, 소련은 쿠바를 보호해주겠다며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가 미국의 전쟁 위협을 받고 핵미사일을 철수해버렸다. 이것은 사회주의권 국가들에게 '소련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북한도 이런 인식을 품기는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1964년경부터는 중국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모택동(마오쩌둥)이 광적인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북한 지도부는 중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이 좀 이상해진 것이다. 1966년에는 북한과 소련 사이에 한때 험악한 분위기까지 연출됐다.

이래서 북한은 중국과의 동맹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북한은 한미일 삼각동맹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런 속에서 자국의 외교적 불리함을 느껴야 했다. 1·21 청와대 기습이나 울진·삼척 침투 같은 북한의 군사적 침공이 1960년대 중후반에 빈발한 데는 김일성의 남한 혁명전략이 작용한 측면도 있지만, 외교적 불리함에서 탈피하려는 북한의 자구책이 작용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2010년 11월 아시안게임이 열린 중국 광저우에는 기의열사능원이라는 열사묘지가 있다. 1927년 중국공산당이 수행한 광저우 봉기(광저우 기의) 희생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묘지다. 이 묘지 안에 북한과 중국의 우호협력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비석 문구는 "중·조 인민의 전투적 우의가 만고에 길이 빛나리라"다. 이 비석이 세워진 때는 북한이 중국을 불신하기 직전인 1964년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런 비석이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a  북한과 중국의 우호를 기념하는 비석. 광둥성 광저우시의 기의열사능원에서 찍었다.

북한과 중국의 우호를 기념하는 비석. 광둥성 광저우시의 기의열사능원에서 찍었다. ⓒ 김종성


1960년대 전반기의 경험을 계기로 북한 지도부는 동맹이란 것에 대해 회의감을 품기 시작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이 결성되어 동아시아에서만큼은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속에, 중국과 소련이 믿을 수 없는 행보를 걷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은 서글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홀로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더욱 더 뼈저리게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이 철학자 황장엽의 도움을 받아 1958년 이후로 체계화한 주체사상이 1960년대부터 영향력을 발휘한 데는 이 같은 정세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소련을 믿을 수 없으니 북한 인민의 주체적 노력으로 북한의 운명을 개척한다는 주체사상이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경험은 북한이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군사적으로도 홀로 사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제9조 제3항에 의해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만이 보유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한층 더 박차를 가한 것도 그런 경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NPT 조약 제9조 제3항에서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만이 합법적으로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핵을 보유하는 국가들은 공교롭게도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뿐이다.

한국전쟁 도와준 건 고맙지만 외세 믿을 수 없다는 북한 

위와 같이 북한은 1960년대부터 중국에 대한 시선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중국 역시 외세이므로 뼛속까지 믿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과의 협력을 공고히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억지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에 김정은의 북한이 두 음악단체의 베이징 공연과 관련하여 다소 강경한 태도를 보인 밑바탕에는 그런 정서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북중관계에서 북한의 불신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 역시 북한을 불신해왔다. 그래서 북중관계는 더욱 더 서먹서먹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그런 불신을 품었다는 점은 지난 수십 년간 북한 지도자들을 은근히 견제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중국 정부는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1956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른바 연안파 인사들을 자국 영역 안에 꽁꽁 숨겨주었다. 중국은 북중관계가 좋을 때는 이들을 스촨성(티베트 옆)처럼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겨 꽁꽁 숨겼다가, 북중관계가 악화되면 이들을 베이징 같은 곳으로 옮겨 대외적으로 드러나도록 했다. 김일성의 적들을 통해 김일성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견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때,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이 중국에 체류하면서 고위층 자제 그룹인 태자당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김정남이 김정은의 이복형이자 라이벌이라는 점을 활용해서, 김정은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카드로 김정남을 확보해두려 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김정남을 보호해주는 중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한쪽이 불신하면 다른 쪽도 불신하기 마련이다. 북한과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호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 정부는 중국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양국 간에는 쉽게 메워지기 힘든 불신의 골이 존재한다. 공훈합창단과 모란봉악단의 공연 취소는 중국에 대한 북한의 오랜 불신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모란봉악단 #공훈국가합창단 #김정은 #북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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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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