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전에서 나오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집시법, 도로교통법 위한 혐의로 수배중이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10일 오전 자진출두를 위해 24일간 피신중이던 서울 종로구 조계사 관음전에서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과 함께 나오고 있다.
권우성
아프리카에서는 지난 2010년부터 3년 동안 약 10만 마리의 코끼리가 상아 때문에 살해돼 사라졌다. 그런데 한국 조계사에서는 천오백 년 된 코끼리가 사라졌다. 어찌된 것일까.
도로교통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나 흉악한 살인자도 아니며, 세월호 1주년 집회와 노동법 반대 시위에 참가했던 이다.
그를 잡으려고 경찰 수백 명이 조계사를 둘러싼 상황에서 조계사 책임자인 자승 총무원장은 사태를 조계종 화쟁위원회에 일임했다. 도법 화쟁위원장은 늘 그렇듯이 '화쟁 정신'을 강조하면서 공권력과 사회약자인 노동자·농민을 상징하는 해고 노동자 사이에 섰다. 대화와 소통으로 서로 이해하고 타협하여 모두에게 바람직한 결론으로 나아간다는 화쟁 정신은 신라 고승인 원효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조계종 성명서의 미묘한 '결'한편 조계사 주변에서는 연일 보수 단체가 '한상균 위원장 체포'를 요구했다. 조계사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던 경찰이 한상균 위원장을 강제로 구인할 것이라고 예상되자 조계종은 지난 9일 성명을 발표하고 "공권력 투입은 한국불교를 짓밟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이는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건강한 사회에서는 종교단체로 피신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국가가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는 상식에 기초한 입장 표명이었다(
성명 전문).
그러나 그 성명서를 조금 살펴보면, 사태의 중심에 선 화쟁위원회의 행보를 알 수 있다. 성명서 내용에는 인내, 대화, 갈등해소, 험난하고 고된 길, 노력, 국민적 열망, 화쟁 등 아름다운 용어들이 현란하게 등장했다. 종단의 인내와 타협을 위한 노력을 강조했으며 국민에게는 조금만 더 인내를 갖고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동시에 한상균 위원장에게는 거취 문제를 신속하게 결정해 달라고 촉구했다. 당시는 국민이 인내를 갖고 지켜봐야 할 정도로, 아직 타협이 안 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쟁위원회의 거취 결정 요구는 상호 조율은커녕 부처님의 대자대비 품으로 피신한 이에게 빨리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욱이 이미 한 위원장을 내쫓기 위해 일부 조계사 신도들의 두 차례 강제퇴거 시도가 있었고, 전날 밤 화쟁위원장인 도법 스님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진 퇴거 요청을 했다는 사실도 알려진 상황이었다. 결국 조계종의 대국민 성명서란, 종교인이 이면에서는 친정부적인 말과 행동을 하면서 대외적으로 국민 대상으로 자신들과 상황을 포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후 당일 오후에는 경찰이 강제 구인을 시도했고, 스님과 신도 들이 밀고 당기는 와중에 갑자기 자승 총무원장이 영장 집행을 하루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찰이 이를 수용했고, 다음 날 공권력을 피해 조계사로 피신했던 한 위원장이 자진출두 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의 옆에는 도법 스님이 최선을 다한 자비로운 승려의 모습으로 함께 걸었다.
앞서 한상균 위원장은 조계사 측에 "국회에서 연내에 노동개악법안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당당히 경찰에 출두하겠다"며 그전까지 조계사에 머물면서 오는 16일 예정된 노동개악법 저지를 위한 총파업 투쟁을 지휘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조계종 화쟁위는 경찰의 강제 구인 시점을 그가 요청한 최소기한인 16일까지도 아니고 단 하루 연장했을 뿐이다.
한상균 위원장의 자진 퇴거 이후 도법 위원장은 지난 사태를 두고 "(노동계, 국회, 사회단체 등이) 규칙도 없는 운동경기에서 양 선수들이 서로 격렬하게 뛰고만 있다"고 비유했다. 주심 역할을 해야 할 정부마저 선수처럼 뛰고 있다며 그를 대신해 종교가 심판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약자의 희생을 '자비'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강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편파적 심판은 상황을 바로 잡지 못하고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조계종-정부는 손해 안 봤지만, 약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