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룡이 나르샤>.
SBS
역사교과서에는 주로 인간의 의지와 활동에 의해 역사가 전개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나 활동보다 역사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후다.
기후는 대기의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대기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어느 생명체도 기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류가 농업을 통해 자연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도 약 1만 년 전에 지구가 빙하기를 지나 간빙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후변화가 없었다면, 지금만큼의 번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SBS, 월화)에는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기를 염원하는 육룡, 즉 여섯 주인공이 등장한다. 고려가 제발 멸망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마치 고려 멸망을 위해 고사라도 지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 육룡 중 다섯 명은 자신들의 브레인인 정도전(김명민 분)이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계책을 내리라 기대하고 있다. 의외의 아이디어와 과감한 행동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드라마 속 이방원(유아인 분)도 기본적으로 정도전의 책략에 의존하고 있다.
기후변화, 조선의 건국 가능케 했다?물론 조선 건국의 아이디어가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도전의 머리가 아니라 '기후의 머리'가 그런 일을 가능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14세기의 기후변화가 없었다면 고려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후변화는 조선 건국의 특등 공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후의 반역>의 저자인 대만 기상학자 류자오민(유소민)의 연구에 따르면, 몽골 즉 원나라가 세계 패권을 장악한 뒤인 13세기 중후반부터 동아시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추운 한랭기 기후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14세기 중후반부터는 추운 것에 대해 건조하기까지 한 기후로 접어들었다. 한랭건조기로 진입한 것이다. 그래서 14세기는 기상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시기였다.
중국 남부에 타이후(태호)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일본 최남단과 위도가 비슷한 상하이의 서쪽에 있으며, 넓이는 서울의 네 배나 된다. 이런 따뜻한 곳에서 1329년에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 이 거대한 호수가 얼어붙은 것이다.
얼음의 두께가 '수척'(1척은 약 30cm)이라고 했으니, 남쪽 지방 호수가 꽤 두껍게 얼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에 태호보다 남쪽인 동정호에서는 감귤이 어는 사건이 발생했다. 따스한 지방에서 성장하는 감귤이 얼 정도로 기상상태가 안 좋아졌던 것이다.
이런 이변이 일회성으로 그친 게 아니다. 기상이변은 계속되었다. 1333년에는 중국 남부에서 10일간의 폭설로 240cm의 눈이 쌓였다. 이런 기상이변이 누적되고 기후변화가 굳어지다가 14세기 중후반에 한랭건조기가 찾아온 것이다.
기후변화는 농업생산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동아시아 최대의 농업지대이자 몽골의 점령지인 중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살기 힘들어진 중국 한족 농민들은 몽골 통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대륙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고려 공민왕이 반몽골 정책을 펴고 중국 농민들이 홍건적의 반란이라는 반체제 운동을 벌인 것이다.
몽골의 본거지로 중국대륙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벌어진 이런 변화는 이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본거지인 중국대륙에서 반란이 심해지고 근처에 있는 고려에서도 반몽골 운동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원장·장사성·진우량 같은 중국 영웅들이 등장하고 이들 중에서 두각을 보인 주원장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이로써 몽골은 북쪽 초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같은 정세변화는 전체 동아시아에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에서는 1392년에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됐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는 일왕(이른바 천황)이 두 명이나 공존하던 상태가 끝나고 남북조 통일이라 불리는 정치적 통합이 발생했다. 오키나와에서는 1406년에 삼국통일이 일어났다. 참고로, 1879년까지 오키나와는 독립국이었다.
이렇게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은, 기후변화가 동아시아 농업생산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반몽골 투쟁과 동아시아의 혼란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정도전·이성계·이방원 같은 인물들은 기후변화가 만들어놓은 링 위에서 활약했을 뿐이다. 그래서 기후변화가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의 동상이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