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 12일 총선연대가 기자회견을 갖고 16대 총선에서의 정의로운 한표행사를 유권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3대 공식은 적용됐다. 우선 당의 실권자가 '물갈이'의 키를 쥐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월 "(정치권을 향한) 국민과 시민단체의 비판은 역사의 큰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라면서 낙천·낙선운동을 사실상 지지했다. 또 총선시민연대의 공천반대자 명단 발표 이후 "시민단체의 운동은 정치권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라면서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역사의 흐름에 부응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권노갑 당시 민주당 고문은 그해 2월 본격적인 공천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김 대통령의 부담을 덜었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도 총선시민연대 대표와 한 간담회에서 "낙천대상자 명단을 당에 비공개로 통보해 달라"라고 제의하는 등 낙천·낙선운동을 사실상 지지했다. 시민단체의 외압을 물갈이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또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회장을 지낸 홍성우 변호사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했다.
대표적인 물갈이 지역을 '안마당'으로 잡은 점도 같다. 새천년민주당의 경우, 호남지역 29개 선거구 중 18개 지역에서만 현역을 재공천했다. 30%대의 교체율인 셈이다. 한나라당이 낙천시킨 다선 중진 인사들은 주로 영남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김윤환 의원은 경북 구미을, 신상우 의원은 부산 사상을, 김정수 의원은 부산 진구을이 지역구였다. 1997년 대선 직전 한나라당과 합당해 당내 '민주동우회' 계보를 이끌고 있던 이기택 당 부총재는 부산 연제구 출마를 요구하고 있었다. 다만 한나라당의 '안마당' 물갈이는 주로 PK(부산·경남)에 집중됐다. 당시 TK(대구·경북) 맹주를 자처하던 김윤환 의원을 제외한 TK 지역 현역 의원들은 대다수 공천을 받았다.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낙천한 김윤환·김상현 의원 등을 주축으로 '민주국민당'이 창당됐다. 특히 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공천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낙천한 김윤환·이기택 의원 본인뿐 아니라 그들의 계보로 분류되던 인사들이 공천에서 탈락한 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르던 옛 민주계 의원 상당수도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총재가 차기 대권주자로서 당을 장악하고 경쟁자들을 제거한 것이란 반발을 샀다.
[17대 총선] 탄핵 역풍 떠밀린 '개혁'... 한나라당은 '이회창계 털어내기' 지적도'탄핵 역풍'이 거셌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물갈이'는 진행됐다.
우선 한나라당은 2004년 3월 15일 전국 243개 선거구 중 228개 지역 공천자를 최종 확정했다. 오세훈·한승수 등 불출마자 27명과 공천을 신청하지 않은 6명, 그리고 공천 탈락자까지 합쳐 148명 현역 의원 중 총 60명이 교체됐다. 40.5%라는 '역대급 물갈이'가 이뤄진 셈이다. 특히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이끌던 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최병렬 당대표에게 불출마를 권고해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초미니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2004년 3월 22일 243개 선거구 중 212곳의 공천자를 확정 발표했다. 현역의원 47명 중 13명이 낙천 혹은 불출마로 교체됐다. 약 28%의 교체율이었다. 열린우리당과 분당, '야당'이 된 민주당은 현역 의원 61명 중 20명을 지역구 공천에서 배제했다. 약 33%의 교체율이었다. 그러나 낙천자 중 비례대표 의원이 10명에 달해 실질적 물갈이 수준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16대 총선에 비하면 실권자의 '입김'은 미미한 편이었다. 불법대선자금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가결 역풍으로 모두 '개혁'에 목매달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당시 이재오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3공과 이어진 5ㆍ6공 분들이 잘한 일도 많지만 인권탄압, 정경유착, 노동탄압 등으로 사람들이 '부패하다'는 소리도 한다"라면서 '5·6공 청산론'을 제기했다.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은 "민생 현장에선 국회의원 당선 횟수를 곧 전과기록으로 보고 있다"라면서 '물갈이' 필요성을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