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지기 주치의와 기념촬영50년 지기인 명지병원 이건욱 교수(간외과)와 함께 기념촬영.
김성한
신이 그를 시험대에 서게 한 것일까. 사달은 하필 순례를 마친 그날 일어났다. 성지 완주의 흥분과 기쁨으로 교단 측이 마련해 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집에 와서 허기를 달래려 버섯을 넣고 된장찌개 끓여 먹은 게 화근이었다.
새벽녘 토사를 쏟아내며 화장실 바닥에 혼절했다. 몸을 너무 혹사해 그러려니 했다. 그새 몸무게가 10kg이 빠졌다. 40여 년 전 담낭절제술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은 비껴가지 않았다. 고심 끝에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을 찾았고 주치의로부터 담도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조직검사 등 정밀진단 결과 여명 2~3년이 예견됐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간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하루 40~50km 걸었고, 많게는 하루 80km를 질주하고도 다음날이면 멀쩡했다. 평생 감기 한 번, 몸살 한 번 앓은 적 없고 온 나라를 들쑤신 메르스 사태 때도 마스크도 없이 마을과 도시를 넘나들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공원 산책에도 진땀을 흘린다. 굵고 차돌 같던 허벅지와 종아리는 근력이 빠지면서 가늘고 흐물흐물해졌다.
"걷기 대왕인 내가 이젠 동네 할멈들한테도 뒤처져요, 허허." 선생은 현재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극심한 통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진짜 상대는 암세포가 아니라 시간이다. 주어진 시간은 2~3년. 그 안에 필생의 역저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란 후회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 삶입니다. 17년간의 객지생활과 10년 유랑을 통해 저는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다만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펴 우리 민족과 하나님의 제전에 받치고 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길에서 만난 민초들이 내 삶의 스승이번 성지순례를 포함해 선생은 지난 2005년 11월부터 정확히 11년간 대한민국을 총 13바퀴를 걸어 여행했다. 거리로 환산하면 3만2500km에 달한다. 서울을 기점으로 동에서 서로, 다음엔 서에서 동으로 국토 맨 외곽을 마름질 따듯 걸었다.
때로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국토를 종과 횡으로 가로지르는가 하면 홍도, 흑산도, 제주도 등 50여 개 낙도로 철선을 타고 건너가 미답의 해안길을 샅샅히 훓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찍은 사진만 100만장에 이르고 매일 기록한 일지는 키보다 높게 쌓였다.
걷기 여행은 일반인의 예상과 돈이 많이 필요한 비싼 여행이다. 혹독한 환경을 장기간 견딜 장비부터, 먹고 자는 비용으로 하루 10만 원 꼴이 소요된다. 국토 한 바퀴를 걸어 여행하는데 대략 3000만 원 정도가 들어간다. 천문학적인 비용은 어떻게 충당했을까.
놀랍게도 2005년 11월 첫 바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길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껏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지원해줬다. 독립자금을 대는 심정이라며 수억 원을 쾌척한 젊은 독지가가 있었는가 하면 식당에서 말 없이 밥값을 내고 가는 아주머니, 주머니에 만원 지폐 한 장을 찔러주고 얼굴을 붉히며 달아나는 아기 엄마 등 수많은 사람들이 대가없이 그를 후원했다. 성지순례 비용도 이들의 소리 없는 후원으로 가능했다.
그렇다고 선생이 사람들로부터 받기만 한 건 아니다. 길에서 만난 병마에 시달리는 시골 촌부들에게 다가가 서울대병원의 분야별 최고 선임의사를 일일이 주선했다. 선생의 직함은 서울의대 명예홍보대사이다.
"돌이켜보면 있는 자, 가진 자들한테 대접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들 사는 게 고만고만한 민초들었어요. 저는 세상이란 명강의장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감했고 삶을 성찰하였습니다. 그 분들이 저의 스승이고 재산입니다." 서울대병원을 마다하고 선생이 멀리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을 찾은 것은 주치의인 이건욱 박사와 영상의학과 박재형 박사 때문이다. 둘 다 서울의대를 정년 퇴임해, 명지병원으로 옮겨 이곳 간센터를 이끄는 최고 명의들이다. 동시에 선생과는 오랜 지기이다.
기적 같은 나눔은 입원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거액의 병원비도 선생의 투병 소식을 접한 전국의 지인들이 힘을 보탰다. 여기에 명지병원 재단 측도 선생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로 병원비 상당 부분을 덜어주고 있다. 선생은 좀체 믿기 어려운 나눔을 두고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이스라엘로 파송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지갑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여행을 위해 여벌옷, 신발,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마태 10,9-10).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테니 옳은 일에만 전념하라는 뜻이지요. 저는 10년간 우리 땅을 걸으면서 성서의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이를 보답하는 길은 책을 집필해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암 따위에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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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지 111곳 돌았는데, 더는 못 걷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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