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현 한국지부) 창립총회에서 한승헌 변호사가 창립선언문을 읽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이른바 '오적(五賊)' 필화 사건의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을 계기로 1972년에 창립된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박정희 정권이 독재로 치닫던 시절에 국제사회와 연대해 양심수 구명운동을 펼친 유일한 단체였다. 75년 자작시 <겨울공화국>을 낭송해 교직에서 해직되고 77년 장시 '노예수첩'으로 구속된 양성우 시인도 앰네스티 양심수였다. 시인 고은과 조태일은 시집 <겨울 공화국>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등 박정희 정권은 시인의 은유처럼 '동토의 왕국'으로 치달았다.
초창기 윤현 목사와 한승헌 변호사가 주도한 앰네스티 운동은 종교인과 사회 명망가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양심수 구원, 사형제 폐지, 고문 철폐, 수감자 처우 개선 같은 인권을 내세운 앰네스티 활동마저 독재 권력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비쳤다. 한승헌 변호사를 필두로 당시 앰네스티 이사였던 문동환-백윤석 목사, 이재정-정호경 신부, 백낙청-이문영 교수 등은 양심수 석방을 외쳤다가 구속되거나 구류처분을 경험했다.
앰네스티는 1980년 5월 당시 한국지부 이사장이었던 한승헌 변호사 등 활동가들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며 지부가 폐쇄되기도 했다. 철조망에 갇힌 촛불과 노란색은 앰네스티 양심수를 상징한다.
민가협이 출범한 1985년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수많은 청년-학생, 노동자, 민주인사들이 구금되고, 안기부와 보안사, 치안본부 대공분실 같은 수사기관에서 고문에 의한 간첩조작과 인권유린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그해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된 김근태 민청련 의장은 당시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만나 22일 동안 전기고문 등을 받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 엄혹한 시절에 보랏빛 스카프를 두른 민가협 어머니들은 인권이 침해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맨 먼저 달려가는 '인권 119'였다.
나는 1980년대 중후반에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 서툴지만 인권의 눈으로 우리 사회의 어둡고 낮은 곳을 탐색하곤 했다. <시사저널>에서'한국의 남파와 빨치'라는 기획기사로 제도권 언론에서는 처음으로 남파간첩 및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실태와 보안감호의 문제점 등을 세상에 알렸다.
노태우 정부 공안정국 하에선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추적 보도했고, 김영삼 정부 들어 첫 간첩사건인 남매 간첩 사건 조작 의혹을 단독 보도하면서 정보기관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팩스신문 <인권하루소식>을 발간하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당시 운영위원은 곽노현 교수, 백승헌-임종인 변호사 등 진보적 법학자와 민변 변호사 10여 명이 참여했는데 기자는 나뿐이었다).
민가협 남규선 총무와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