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특회 시위 장면2014년 1월 일본 도쿄 한 거리에서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가 혐한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MBC 'PD수첩' 캡처
리에 선생의 말이 이어진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저렇게 진심으로 사죄를 하네요. 재미있죠? 일본이라는 국가와 비교하면요. 일본은 왜 위안부, 아니 성노예 강제 동원이나 '난징 학살 사건'처럼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한 과거사에 관해서는 진심으로 사죄, 아니 사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심어린 사과라도 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요. 그렇지만 만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기만 하니까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에 대해 못 미더워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저도 리에 선생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우리 어릴 때 위안부에 대해서 배웠고요. 일본이 과거에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에게 여러모로 폐를 끼쳤다는 것을 역사시간에 배웠거든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 교과서를 보면, 마치 그런 과거는 없었던 것처럼 돼 있어요."에리코의 말이 사실이다.
"그러니 참 답답해요. 저렇게 극우 집단은 활개를 쳐 가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데도 왜 진정한 지식인 집단들은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하는 것인지. 어쩌면 지금 일본 사회의 침묵은 또 다른 거대한 범죄를 방조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과거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일 지식인들이 히틀러의 야욕과 폭력에 대해 눈 감은 것처럼요."리에 선생이 극심하게 자조한다. 이렇게 일본 보수 극우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양심 있는 식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사그라든다. 그럴수록 공허한 소수의 목소리는 일본에 대한 레퀴엠처럼 슬프기만 하다.
대통령 광복절 기념식이 취소됐다. 8월 15일 오전 6시쯤 북한이 미사일로 추정되는 로켓을 발사해 국가안전보장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북한은 기존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와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에 이어 동창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태평양을 향해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보이는 로켓을 실험 발사했다. 이 미사일은 일본 본토를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사일을 발사 소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우리 군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조짐을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한 이유는 뭐냔 말이에요?"대통령은 격앙돼 있다. 하지만 외교안보수석과 국방부장관은 꿀 먹은 벙어리다. 조기경보시스템은 있으나마나다. 한국의 눈과 귀가 돼 온 미국 측 사전 통보도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서로 단교 직전까지 간 일본 측이 자국의 군사위성에서 감지한 내용을 한국 측에 친절하게 알려 줄 리 없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야당인 민주복지당의 국방비 삭감 때문에 군사위성 개발과 발사가 늦어진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일단 미국 측과 연락해서 이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고, 가능하면 일본에도 정보협조 요청을 하세요. 관계 장관 회의를 소집해서 향후 우리가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할지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고요."대통령은 맥이 빠진다. 늘 이런 식이다. 청와대는 물론 군부 내에서 조차 한국 안보에 위기 상황이 초래돼도 미국만 바라보는 짓을 반복할 뿐이다. 한국군 자체적 정보수집 능력이 부족한 데다 아직까지 한국 전시작전권은 미국의 손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적인 군사능력은커녕 모든 정보까지, 그야말로 군사전문가들 말대로 '비대칭적'으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스템이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 당분간 계속될 것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본과 미국 쪽도 바삐 움직인다. 일본과 미국은 이 모든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양국 미사일방어시스템의 정확도와 신속도를 중국 측에 노출하는 사안이라 비밀에 부친 것이다.
백악관에서 국방부 부장관이 대통령 안보보좌관에게 상황을 브리핑한다.
"보도된 바와 같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있었습니다. 그 제원과 사거리 등에 대해 면밀히 검토 중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 추진력이 모자라 하와이 근처까지 도달하기도 힘든 수준입니다. 그리고 핵탄두 탑재 능력은 아직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 해도 괌이나 일본 전역에 재래식 폭탄을 실어 공격하게 된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분석됩니다.""본토를 위협할 수준은 아니다... 그럼 일단 해프닝으로 보면 되겠습니까?""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다만 일본 측에서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이 일본인 납북자 송환 문제에 대해 계속 거짓말로 일관해 더욱 북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일본과는 필요한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한국에는 이에 대해 정보를 선별해서 주도록 합시다."미국 의중에서 한국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의 중국 접근에 대해 심한 배신감과 함께 이제는 의심까지 품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 미국에만 의존하던 한국은 무기 수입 다변화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그래서 미국은 유럽연합 측과 한국에 대한 무기 수출을 위해 경쟁해야 할 상황이 됐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게다가 미국이 몇 년 전부터 요구해온 고고도 미사일 방어시스템 도입을 한국이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미적거리고 있다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의 패망일, 일본에서 말하는 종전기념일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연휴 마지막 날 내각에서 총리를 중심으로 관계 장관의 긴급회의가 열렸다는 뉴스가 나온다. 하지만 그저 긴급하다는 시늉뿐이다. 미리 알고 있었던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일본에게는 북한 미사일 발사가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 준 격이다. 최고의사결정연구단 다케우치의 시나리오를 북한이 충실히 따라준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일본에게 8월 15일은 그냥 쉬는 날이다. '오봉절'이라고 해서 빗대어 말하자면 한국의 추석 비슷하게 대체로 양력 8월 13~15일을 쉬는 연휴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날'이다. 만날 일본 총리나 장관,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주변국들에게 말썽을 일으키는 날이기도 하다.
종전기념일을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날로 삼은 것은 일면 타당하다. 문제는 전쟁을 일으킨 자들을 대놓고 참배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론에서는 전범자들의 위패를 따로 떼어내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것은 절대 안 된단다. 그런 유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종전기념일은 일본 보수 우익에게는 '살판'나는 날이다. 모두 함께 모여 전범자들을 추모하며 태평양전쟁의 피해자인양 집단 시위할 뿐 아니라 군국주의로 회귀는 물론 일본 일왕을 실질적 지도자로 내세우자는 주장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한국과의 관계가 벼랑 끝에 온 데다 북한은 이른 아침부터 미사일을 쏘아 대니 금상첨화였다.
도쿄 지요타구 왕궁 북쪽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야스쿠니 신사로 향하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 미키는 아침 일찍 아버지 집에 들렀다가 바로 야스쿠니 신사 취재 현장으로 나왔다. 휴일도 없는 것이 그의 직업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미치도록 싫었다. 일하러 나온 미키였지만 일을 온전히 할 수 없었다. 원치 않는 잇단 야근에, K를 찾는 일로 몸과 마음은 조금씩 메말라갔다. 이젠 그의 강단 있는 모습도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 슬픈 것은 풍경의 우스꽝스러운 색조 대비(對比) 때문이다. 미키의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을 흔적 없이 불시에 잃고는 온통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하지만 밖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자못 경건한 모습으로 모형 총까지 어깨에 걸치고, 이마에는 붉은 일장기를 두르고, 깃대에는 새빨간 햇살이 날름거리는 욱일기를 날리는 희극적인 광경을 펼친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꿈이면 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 영화 <테이큰>에서 딸을 찾는 브라이언(리암 니슨)이라면 악당들과 목숨을 건 일전이라도 벌여서라도 딸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처럼 불쌍한 아내 지오바나(소피아 로렌)라면 몇년이 걸리더라도 묻고 물어 소련에까지 찾아가 남편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를 만나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