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부산 국수 공장에서 여성노동자 모습
철수와영희
이 나라 사내는 왜 평등이나 평화나 민주로 가는 길하고는 동떨어질까요. 어릴 적부터 평등이나 평화나 민주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나이가 든 뒤에도 평등이나 평화나 민주를 배울 생각을 스스로 안 했기 때문일까요.
공공기관에서 높은 자리를 맡기는 까닭은 일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뒷돈을 빼돌리라고 높은 자리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을 비롯해서 낮은 자리에 앉은 이들까지 온갖 정책이나 사업이나 공사에서 뒷돈을 으레 빼돌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멈추지 않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언저리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에도 이러한 흐름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내들이 집안일을 할 줄 안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사내들이 집 바깥만 나돌면서 지내기만 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함께 맡았어도 이런 짓을 일삼았을까 하고.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가시내한테만 맡긴 사내입니다. 아버지 자리에 서는 사내는 으레 집 바깥에서 돈만 버느라 바쁩니다. 아버지로서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거나, 삶을 보여주거나, 사랑을 물려주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어쩌면, 아버지 자리에 설 사내는 말도 삶도 사랑도 모르는 탓에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아이 곁에서 아이를 따스히 돌보면서 살림을 가꾸는 일을 못 하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이리하여, 삶을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도 삶과 동떨어진 일을 할는지 모릅니다. 삶도 사랑도 모르는 탓에 사회에서도 자꾸 엉뚱한 짓을 벌일는지 모릅니다.
미군정기 당시 미군 범죄는 총상, 강도, 절도, 주택 침입, 폭행, 상해, 교통사고, 밀매 따위로 다양했다. 그 가운데 성범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 미군 성범죄는 조선인 통역을 낀 채 대개 2∼3명이 무리를 지어 여성들을 차에 태워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납치하는 방식이거나 새벽에 민가를 침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246쪽)법령 제70호인 인신매매 금지령의 이중성이 오히려 '사창'을 증가시켰던 것처럼 법령 제72호 제70조 역시 성매매에 대한 미군정의 이중적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곧 미군에게 성병만 감염시키지 않는다면 성매매는 얼마든지 인정됐다. (303쪽)주한미군 범죄는 미군정 무렵부터 그치지 않습니다. 미군정기에 미군이 벌인 성폭력을 놓고 제대로 재판을 벌인 일이 드물다고 합니다. 재판장에 미군을 세웠어도 '성폭력'이 아닌 '폭력'으로만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나마 재판장에 섰어도 거짓말만 하는 미군 손을 들어 주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해방 언저리 한국 재판장에서 미군 범죄를 똑똑히 다스렸으면 그 뒤로 이 나라에 미군 범죄가 함부로 발을 붙이지 못했으리라 느낍니다. 미군 범죄뿐 아니라 다른 범죄도 그렇지요. 나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정치와 사회와 문화와 교육이 모두 식민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일본 말투는 아직도 한국 말투를 어지럽히기도 하지만, 이를 못 깨닫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군대 같은 얼거리가 한국 군대와 사회에 아직도 또아리를 틉니다.
바야흐로 평화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평화와 먼 모습이 됩니다. 평화와 함께 평등을 살피지 않는다면 평화도 평등도 뿌리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평화와 평등을 가꾸면서 민주를 싹틔워서 자라도록 북돋우지 않는다면,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문화와 교육도 참다이 일어서기 어렵습니다.
여성의 직분이 현모양처라고 주장한 우익의 담론에는 여성해방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 않았으며, 여성해방에 대한 전망 또한 없었다. 그것은 여성해방을 주장하면서도 오히려 남녀 불평등을 온존시키는 기능을 했다. 여성해방은 뒤로한 채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여성들을 다시 가정에 묶어 두려는 담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담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총력전 체제 아래에서 여성 지식인의 현모양처론과 닮아 있다. (3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