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부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쩐 종말을 향해 가는가? (17쪽)
백화점에는 내 관심을 끌 만한 것들이 없었다. 내 옷은 어머니가 손수 지은 것 아니면 통신판매사 시어스의 카탈로그에서 주문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인공적인 환경은, 막 형성되기 시작한 교외의 모습이라 해도, 게나예나 한 가지라 지루할 뿐이었다. 어딜 가나 벽돌 한 장, 지붕 판자 하나까지도 판박이였다. 그러나 자연은 차원이 다르다. 나뭇가지 하나, 구름 한 덩이, 바다의 파도 하나도 같은 게 없어 제각각 눈길을 끈다. (32쪽)바버라 에런라이크 님이 쓴 <신을 찾아서>(부키,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도 어릴 적에 '무엇인가'를 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녁이 본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예배당에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많고, 성경을 가르치려는 학교는 있어도,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밝혀 주는 길잡이나 어른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신을 찾아서>를 쓴 분은, 또 이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신(神)'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는 '님'이 있습니다. '지기'라든지 '지킴이'도 있고, '하느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한겨레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 땅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기 앞서부터 '하느님'을 늘 말했습니다. 그리고, 해님·달님·별님·꽃님·숲님처럼, 모든 목숨이나 숨결한테 '님'을 붙였지요.
개님이나 고양이님이나 닭님이나 범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목숨붙이가 어떤 넋인가를 헤아리면서 '님'이라는 말을 붙여요. 그래서, 풀님이나 나무님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말은 풀과 나무를 고이 아끼는 몸짓이 됩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밥님'이라 말하고, 가문 땅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비님'이 오신다고 외치지요.
학습 친구들은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허수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남들이 무엇을 목구멍에 쑤셔넣든 그대로 삼키게 될 거라고. (52쪽)생명의 목적은 죽음일까, 아니면 계속 살아 있는 것일까? (64쪽)
우리는 지상에서 짧은 삶을 살다 죽지만, 대신에 의미라는 영예로운 보상을 받는다는 것. 이때 의미는, 찾으려고만 들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고, 죽음의 순간에 저 높은 하늘에서 북극광처럼 빛나면서 그간의 모든 하찮음과 고통을 상쇄해 준다는 것. (76∼77쪽)사람은 살려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려고 태어나기에, 살면서 할 일을 할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사는 동안 죽음만 걱정하다 보면, 정작 스스로 할 일을 놓치거나 멀리하고 말지요. 돈을 버는 까닭이 오로지 돈벌이를 하려는 뜻이라면 죽는 날까지 돈은 실컷 벌 만하리라 느껴요. 돈벌이에만 뜻을 두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뜻이라면 말이지요.
학교를 오래 다닌다든지 책을 많이 읽는 일도 이와 같아요. 왜 학교를 오래 다녀야 할까요. 왜 대학교나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 책은 몇 권이나 읽어야 할까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얼마나 보아야 할까요. 사랑하는 짝은 몇 사람이나 사귀어야 할까요. 밥은 하루에 몇 그릇을 먹어야 배부르거나 넉넉할까요. 자동차는 얼마나 몰아야 하고, 잠은 얼마쯤 자야 할까요.
얼핏 보기에 너무 마땅할 수 있지만, 곰곰이 따지면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늘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새롭게 바라볼 때에 비로소 삶이 새롭게 열리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숨을 쉬지 않으면 누구나 죽지만, 숨쉬기를 생각하며 숨을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숨을 쉴 적마다 '아, 난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마시는 숨이 얼마나 달콤하거나 고마운가를 문득 생각할 만해요. 맑거나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고 싶다는 꿈을 품을 만해요. 오늘은 매캐한 배기가스가 가득한 도시에서 살지만, 언젠가는 따스하고 시원한 바람이 사랑스러운 숲집에서 살겠노라는 꿈을 품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