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인권식당-인권으로 지은 밥, 연대로 빚은 술을 나누다>(따비 펴냄)의 저자인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류은숙씨.
류씨는 "한국 사회가 워낙 어렵다 보니 극단적인 고통에 처하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이유로 그런 애기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며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권을 좀 더 가깝게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쓰게 됐다"고 소개했다.
유성호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 작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 한 귀퉁이 건물에 '심야인권식당'이 있다. 낮이면 인권 관련 토론과 강좌가 열리는 이곳은 밤마다 술상이 펼쳐지는 '술방'으로 변한다.
20㎡(6평) 남짓한 술방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인권활동가, 관련 연구자와 법조인, 때로는 인권 침해 당사자들이 찾아와 따뜻한 밥을 한술 뜨고 술잔을 경쾌하게 부딪치며 말한다.
"주모, 여기 한 잔 더요!" 사회 소수자들, 인권 운동 안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성 들여 밥과 술을 준비하는 '주모'는 바로 인권활동가 류은숙씨다. 그가 상근 활동가로 있는 인권연구소 '창'은 원래 인권의 실천과 구제 방법을 연구하고 인권실태보고서 등을 내는 진보적 연구단체이지만, 주모의 수고 덕에 종종 '눈물 밥'에 '웃음 안주'를 나누는 술방으로 변하곤 한다. 10월 말, 바로 그 술방에서 주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류은숙씨는 인권을 식탁에 비유하곤 한다. "차린 음식이 없어도 모든 이가 편한 마음으로 둘러앉을 수 있으며, 누구나 사회 속 자기 자리에 정당하게 앉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주로 "집밥을 먹는 게 비일상적인 경험인 사람들"이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술방에서 나눈 음식과 이들 이야기가 버무려져 최근 신간 <심야인권식당-인권으로 지은 밥, 연대로 빚은 술을 나누다>(도서출판 따비 펴냄)가 나왔다.
책 속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돼 인권 유린을 당한 피해자, 늘 거리에서 약자와 함께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M신부, 집회마다 경찰들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는 인권변호사, 동료의 자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성 소수자 인권활동가 등. 모두 익명이지만, 관련 뉴스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만한 이들이 등장해 어디에서도 하지 못했던 속 얘기를 풀어놓는다.
오지랖 넓고 손 큰 주모가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행복하다. "파업이 오래되다 보니 서로 긴장이 심해져서 마주하기를 피했는데, 이렇게 같이 모여 앉으니 정말 좋네요." 서울 대한문 앞에서 장기 복직투쟁을 이어가던 한 노동자의 말은 읽는 사람마저 코끝이 찡하게 만든다. 천막 농성장이 안방이고 길가 한뎃잠이 일상인 이들에게, 그녀가 건네는 "오셔서 잠깐 목축이고 가시라"는 한 마디는 그 자체로 시원한 생수일 터다.
나처럼 쌍방의 관계 또는 당사자 관계에서 한없이 미련하고 서툰 사람은 자주 궤도이탈을 한다. 하지만 그런 때일지라도 현명한 제삼자가 되려는 노력은 멈추고 싶지 않다. (…) 숱한 갑을관계의 엮임에서 누구 곁에 서서 누구 손을 잡아줘야 할지를 아는 제삼자, 빗발치는 말과 글에서 자유로운 의견과 사람에 대한 모욕을 구별할 줄 아는 제삼자, 나의 고통에 쓰라린 만큼 타인의 고통에 반응과 울림을 보일 줄 아는 제삼자.이 책의 제목을 빌린 (일본드라마) <심야식당>에서 나는 그런 현명한 제삼자들을 본다. 주인장이나 손님들이나 당사자들 문제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자기비하에 빠져 있는 걸 내버려두진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 남을 무시하고 잘난 척을 할 때는 단호한 반응을 보인다. 없는 듯 있는 강력한 법이 거기에 있다. - <심야인권식당>, 277~278쪽
류씨는 책에서 "내가 끼고 싶은 '장'은 나를 중심으로 골골거리는 곳도 남을 중심으로 앓는 곳도 아닌, 공통된 고통을 놓고 의논하는 장"이라고 말한다. "하는 것도 구차하고 듣는 것도 지치는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고통으로 만드는 힘은 여럿의 연대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손님들은 오늘도 술방으로 모여든다. 세상에서 느낀 모욕과 눈물을, 견딜 만한 안주로 만드는 이곳 '인권심야식당'에서 현명한 주모를 만나기 위해.
다음은 류은숙씨와 한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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