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드리워진 감정의 윤곽선

[사춘기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편지 ⑤] <쏘피가 화나면 정말정말 화나면...>

등록 2015.11.07 17:05수정 2015.11.07 17:05
0
원고료로 응원
쏘피가 화나면- 정말정말 화나면... 글/그림 몰리 뱅  옮긴이 이은화

케이유니버스

쏘피가 화나면- 정말정말 화나면... 글/그림 몰리 뱅 옮긴이 이은화 케이유니버스 ⓒ 우상숙


쏘피가 화나면 정말정말 화나면, 마술을 부린 듯 쏘피의 윤곽선은 빨간색으로 달라졌다. 고릴라 인형을 사이에 두고 언니와 벌이는 치열한 신경전에서 쏘피는 얼떨결에 넘어지고 말았다. 처음 노란색이었던 쏘피의 윤곽선은 주황색으로 달라지더니 급기야 화산처럼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종이 인형처럼 테두리에 색깔을 입혀놓은 이 윤곽선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다.

이 윤곽선을 미래의 새로운 아이템이라고 쾌재를 부르는 어떤 발명가가 있다면 말이야. 이 아이템의 목표는 단 하나, 감정과 감정이 부딪히는 소모전을 지구에서 퇴치시키는 것이다. 심리학과 패션과 과학의 전문 분야를 분주히 넘나들며 연구한 노력 끝에 탄생한 일명 감정의 옷. 감정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최첨단 센서가 내장된 옷을 입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분이 좋을 땐 노란색이었다가 기분이 나쁠 땐 빨간색으로 옷색깔이 달라진다.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전으로 우울해진 지구에 평화가 성큼 다가올 것도 같은데. 감정도 눈으로 판독 가능한 최첨단의 문명사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에 잘 뵈지 않는 요놈의 감정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곤 한다. "짜증 나" "화가 나"를 삼시 세 끼마다 입에 달고 살아간다. 고릴라 인형을 서로 차지하려는 마음들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어떤 이성적인 판단이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쏘피의 윤곽선은 활활 불타오르는 화산처럼 커져 쏘피를 곧 삼켜버릴 기세였다. 쏘피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불기둥은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쏘피의 집은 화염이 이글거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것이었다.

마그마처럼 모든 것을 잠식해버릴 이 뜨거운 감정의 덩어리들. 어렸을 적 이 그림책을 보면서 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뻘겋게 달궈진 쏘피의 얼굴이 바로 엄마의 얼굴이라고 생각했겠지. 다시 펼쳐 본 그림책에서, 엄마는 너의 얼굴을 발견했다. 화산의 분화구를 품은 듯 여드름 난 네 얼굴이 그림책 속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기 우리 아들의 자화상이 들어 있네. 오래된 추억의 낡은 그림책이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구나.

온 집안을 잿더미로 만들 수는 없는 법. 쏘피는 밖으로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뒷동산의 언덕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쏘피의 달음박질은 쏘피에게 새로운 풍경을 선사했다.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 속에 마음은 천천히 풀어졌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그 이유들은 아주 사소했다. 언니와 다투었던 장난감 방도 한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에는 쏘피를 언덕으로 달리게 한 이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별 것 아니었다.

쏘피의 달리기는 거대해진 감정에 짓눌려 뜨거운 불기둥이 되지 않기 위한 쏘피만의 해법이었다. 약간의 거리만 있어도, 감정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나와 감정 사이에 마련된 거리감이 없다면 감정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없다. 책을 읽을 때에도 일정한 간격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속에 꼭꼭 숨어버린 감정을 읽어내려면, 그보다 더 먼 거리가 필요하겠지. 나와 나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

사람의 감정은 세상 모든 풍경 속에 스며든다. 내 마음이 빨강이면 나무도 빨강이다. 내 마음이 분홍이면 잎사귀도 분홍이다. 내 마음이 네모이면 세상도 네모이다. 쏘피의 감정에 따라 주변 사물들의 윤곽선은 달라졌다. 쏘피의 윤곽선이 빨강이면, 숲속 나무의 윤곽선도 불그스름했다. 쏘피의 윤곽선이 노랑이면, 숲속 나무의 윤곽선도 환한 노랑이었다.


내 마음의 윤곽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나의 눈길이 닿는 곳에 나의 감정도 다다른다. 내 마음을 모를 때, 나의 눈동자가 머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돌멩이를 지나치는 발걸음을 보면, 단박에 내 마음이 보인다. 그래서 주변의 나무 한 그루와 작은 돌멩이가 그리 사소하지만은 않다. 나무와 돌멩이와 사람은 하나로 이어져 지구라는 별에서  공존하고 있다.

엄마에게도 사춘기가 있었다. 엄마의 사춘기는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에 갇힌 듯 암울하기만 했다. 지구에 떠도는 외로운 회색인간이 되어 하염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엄마가 살던 동네에는 빽빽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이어진 가로수길이 있었다. 동네 외곽에 있었던 그 길을 엄마는 틈만 나면 걸었다. 인적이 드문 그 길 아래에서 어린 사춘기 소녀는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간밤에 읽었던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면 초등학교 뒤편의 언덕길로 향했다. 가파른 언덕에 다다르면, 가뿐 숨결 사이로 넙죽 엎드린 지붕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얼룩덜룩한 지붕들은 세상을 향해 거칠게 일어서는 물결처럼 보였다. 어서 일어나라고, 낮은 지붕들이 부르는 손짓들에 혼자 쓸쓸한 웃음을 삼켰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무작정 걸었다. 왜 걸어야 하는지 이유도 없었다. 발목에 감기는 뻐근한 느낌과 고단함이 그냥 좋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면 아주 먼 곳에 다녀온 것 같았다. 그 사이 뭔지 모를 것들이 말끔하게 지워진 듯 했다.

잠긴 너의 방문을 보며, 사춘기 소년의 방황이 저렇게 소극적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엎드려 종일 스마트폰이나 주무르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 속에서 뭔가 울컥 치솟았다. 너의 고요한 세계에서 삑삑 병아리처럼 울어대는 것은 카톡의 알람 소리였다. 저 놈의 스마트폰을 박살내버리면, 너의 잠긴 방문이 스르르 열릴 것도 같았다. 밖으로 뛰쳐나가 걷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혼자서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지, 삑삑 울어대는 알람 소리가 엄마의 가슴을 박박 긁어댔다.

그런 엄마를 향해 따금하게 꼬집는 시 한 편을 우연히 만났다. 일본의 문인 나쓰메 소세키의 시 <홍시여>의 전문을 소개할게.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깊어가는 가을 저녁, 붉은 홍시 한 알이 새파랗게 떫은 감이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엄마의 엄마도 그랬을 테지. 웬 계집애가 틈만 나면  빨빨거리며 싸돌아다니는지, 사춘기 소녀의 빈 방을 향해 쯧쯧 혀를 차며 탄식했을 거야. 텅 빈 방을 보면서 입안에 퍼지는 이 떫은 맛을 헹구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찬물을 들이켰을까. 혼자 가지 끝에 매달려 가을 찬바람 속에 익어갈 땡감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낸다.

어린 쏘피가 선택한 달리기, 이참에 엄마도 따라해볼까 궁리 중이다. 강변 산책로를 같이 뛰어보지 않으련. 너의 실루엣에 둘러진 시뻘건 윤곽선을 순한 병아리 색으로 만들 수 있다는데. 감정의 색깔을 조절할 수 있는 달리기라면 한번 뛰어볼만 하겠지? 감정에는 색깔도 무늬도 있다는데, 우리도 감정의 필살기를 찾아 열심히 뛰어보면 어떨까.
첨부파일 쏘피가화나면.jpg

소피가 화나면, 정말 정말 화나면 - 소피의 감정 수업 1

몰리 뱅 글.그림, 박수현 옮김,
책읽는곰, 2013


#사춘기 #감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AD

AD

AD

인기기사

  1. 1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2. 2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5. 5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