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를 펴낸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구영식
그의 자유언론운동은 민주화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1969년) 이후 권력의 언론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리영희는 중앙정보부(중정)의 압력으로 외신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아예 <조선일보>를 떠났고, 남재희(전 노동부 장관)도 정치부장에서 논설위원으로 밀려났다.
잡지 <청맥>의 편집인을 지낸 김상기는 중정에 끌려갔다가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임 전 부사장도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1대학에서 알베르 소불(Albert Marius Soboul) 교수의 프랑스혁명사 강의를 들었고, <르 몽드>에서 한 달간 일했다.
임 전 부사장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체제'(제4공화국)를 수립했다. 그는 1년 뒤인 1973년 <대한일보>로 옮겼지만, 두 달 만에 폐간됐다. 이후 1974년부터 <한국일보>에 들어가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1970년대 중반 어느날 <민족경제론>의 저자인 박현채(전 조선대 교수)가 "임형은 재주가 메주인갑네... 다 목이 잘리는데도 잘도 견디니 말이여"라는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재주가 메주다'는 재주라고 할 만한 게 없거나 재주가 형편없다는 뜻이다.
결국 임 전 부사장은 유신헌법을 비판한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참여했고(1974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자유언론투쟁('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을 적극 지지.지원했다(1974년과 1975년). <조선일보>에서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고 있을 때 정치부 차장인 이종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전두환 등 신군부를 비판하는 '지식인 134명 시국선언'에 참여했고, 결국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한국일보>에서 해고된 뒤 투옥됐다.
미국 하버드대학 부설 국제문제연구센터에서 공부하다 귀국해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전신)의 결성에 참여했고(1984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를 지냈다(1987년). 특히 1988년에는 <한겨레> 창간에 참여해 초대 편집인 겸 논설주간, 초대 부사장, 논설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한겨레> 창간을 두고 "내 삶의 절정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등에서 벌인 자유언론운동은 '언론민주화운동'이자 '사회민주화운동'이었다.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장을 지낸 신홍범은 임 전 부사장 회고록의 발문('참언론을 향해 걸어간 머나먼 발길')에서 "내가 임재경 선배로부터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대목은 바로 끊임없는 참여(앙가주망)정신이다"라며 "발언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이다"라고 썼다.
임 전 부사장은 1983년 <상황과 비판정신>(창비)을 펴냈다. 그의 관심분야가 '경제'와 '국제문제'였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책에서 아랍(중동문제)의 현실을 분석한 것은 상당히 선구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리영희가 중국이나 베트남에 관심을 보인 것과 묘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