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소 제약회사 연구원 시절.
한도원
끈질긴 임상실험에 질려 버린 화학자들여기서 잠깐 당시의 피임약 연구에 대한 사회 문화적 환경을 언급해야 겠다. 1960대 당시 미국은 인종간 평등은 물론 성의 평등에 대한 대변혁기에 있었다. '여성의 몸은 여성이 주인이다'라는 기치 아래 여성해방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이에 동조한 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제약업계는 여성해방운동그룹들의 적극 지원 아래 피임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역사 이래 최초로 경구 피임약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시중에 막 개발되어 나온 경구 피임약들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알약을 취해야 했고,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부작용이 많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약사들의 최대 관심은 적은 양으로 부작용이 없는 피임약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우연찮게도 동양의 가난한 나라, 그나마 남녀 평등이란 꿈도 꾸지 못할 나라에서 온 나는 머나먼 미국 땅의 격변하는 문화적 환경이 놀랍고 흥미롭기까지 했다. 나의 연구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입사 초반에 한바탕 '말썽'을 일으킨 나는 매사에 신중하고도 끈기 있는 자세로 연구에 임했다. 몇 개월을 연구팀에서 일하다 보니 새로운 합성제를 만드는 일에는 화학자들의 도움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소 연구단지에 내의 화학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나의 합성제 만들기 연구는 서서히 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합성제의 생물학적 활동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스크린(가려내기)을 해야 했고, 이는 지루한 시간 싸움이 필요했다. 이제까지 화학자들이 구성원자들을 조작해 순전히 화학적 호르몬 합성제를 만들어 놓으면, 제약회사 연구원들은 대체로 1회성 스크린으로 그 합성제가 호르몬으로서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하고는 끝을 맺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의 화학적 호르몬 합성제를 놓고도 여러 각도에서 스크린 작업을 했다.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 화학자들은 내가 지루한 스크린 작업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 지 염려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같은 일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합성제를 접할 때마다 "이 합성제가 새로운 약이 될 수도 있어!, 내가 새로운 약을 발견할 수도 있어!"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했다. 동료 화학자가 화학적 방법으로 유사 호르몬 합성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날을 보냈다면, 나 또한 그 합성제가 실제로 호르몬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데 여러날을 보냈다. 화학자들은 나의 이러한 끈기와 열정에 감탄하고 고마워 했다. 자연 그들과 돈독한 관계가 이뤄지게 되었다.
화학자들과의 좋은 관계맺기는 이후로도 30여 년 동안 지속됐고, 나의 연구에서 고비마다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결국 은퇴한 지 10여 년이 흐른 후에 화학자들 가운데 몇 명이 내 이름을 따서 지역 연구단지의 한 건물을 '한도원 콘퍼런스 룸'(Do Won Hahan Conference Room)으로 명명하도록 공식 요청했다. 지난 2013년에 최종 승인을 얻은 '한도원 콘퍼런스 룸'은 펜실베이니아 스프링 하우스의 잰센제약연구소(Jansen Pharmaceutical Research)의 한켠에 헌정되어 콘퍼런스를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전세계 과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1968년 입사 첫해에 신참으로서는 센세이셔널한 '말썽'을 일으킨 끝에 회사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1년 후에는 과학자로 승진했다. 앞서 소개한 합성제 실험 프로젝트 외에 다른 여러 건의 프로젝트에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놓아 회사 측으로부터 주요 연구원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의 진로를 존손앤 존슨 연구원으로 정한 것은 참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신나고 재미가 있었다. 나는 주중이고 주말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소에서 살며 연구에 몰두했다.
일 자체가 보람있고 재미있다 보니 급료에도 불만이 없었고 승진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부분 미국인들이 4~5년 정도 근무하면 급료와 승진에 불만을 표출하고 회사를 그만 두는 일이 흔했으나, 나는 내 연구 자체에 만족하며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미국인 친구들은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했다. 이런 와중에 나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나는 1970년에 시니어 과학자로, 1973년 연구 그룹 리더, 1975년에는 섹션 헤드가 되었고, 1982년 부디렉터에 이어 1987년에는 디렉터 자리에 올랐다. 1992년에는 연구소 최고의 지위인 석좌 연구원 자리에 올라 2002년 은퇴할 때까지 후학들을 지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