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천문대에는 지난 1972년 이후 관측일지가 모두 보관돼 있다(위). 지난 1995년 11월 박승철 연구원과 한원용 실장의 관측 기록
김시연
"아마추어 천문가로서 열정 높이 사 천문대 연구원 발탁"당시 이들과 4년 가까이 함께 일했던 성언창 소백산천문대장은 "당시 한원형 박사는 늘 우리가 박승철 연구원을 지원해주면 나중에 큰 일을 할 거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국립천문대(현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천문학 비전공자이면서 아마추어 천문인으로 활약하던 박승철씨를 연구원으로 발탁한 건 나름 파격적인 일이었다. 국내 아마추어 천문 활동이 막 태동하던 시기여서 저변이 얇은 데다, 천문학 전공자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언창 대장은 당시만 해도 지름 1.8m짜리 국내 최대 망원경을 갖춘 보현산 천문대가 들어서기 전이라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소백산 천문대가 차지하는 위상도 지금보다 컸다고 말한다.
"전문가들 속에 비전문가, 아마추어가 들어와서 약간 겉돌만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소백산 멤버들끼리 친하게 지냈어요. 박 연구원이 혜성 사진을 찍고 초신성을 찾을 수 있게 망원경 사용 시간을 할애했다는 건 그만큼 다른 연구원들도 그의 작업을 이해했다는 의미죠. 특히 당시 소백산 천문대장은 박 연구원이 은하를 관측하고 천체자신을 찍는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어떻게든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당시 석·박사 학위 논문을 뒷받침할 자료를 확보하려고 망원경을 활용했던 다른 연구자들과 달리 박승철씨는 오롯이 천체 사진 촬영이나 초신성 발견 같은 '아마추어 천문가' 영역에 도전했다. 이는 당시 '천문학 대중화'를 바라던 한국천문연구원의 이해와 잘 맞아떨어졌다. 박씨도 아마추어 천문인들을 소백산 천문대로 불러 '스타파티(천체관측행사)'를 열고, 교원 대상 연수를 기획하는 등 천문학 대중화에 힘썼다.
하지만 곧 한계가 드러났다. 소백산 천문대를 이용하는 천문학 전공자들이 늘면서 정작 박씨가 설 자리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결국 박씨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가 한창이던 1998년 12월 소백산을 내려왔다. 이후 안성천문대, 세종천문대 등 민간 천문대 확대에 힘쓰다 지난 2000년 12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어린 딸, 그리고 천체사진 수천 장을 남긴 채.(
박승철 추모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