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존재를 증명하라

[철학 인물사] 안셀무스

등록 2015.11.02 09:15수정 2015.11.0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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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철학 인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할 인물은 안셀무스입니다. 그는 초기 스콜라 철학자 중 한사람입니다. 보에티우스 다음에 소개하는 서양철학 인물이네요. 안셀무스는 지금은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오스타라는 지역에서 1033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군둘프는 롬바르디아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에멜다는 부르군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어느 정도 부유한 하류 귀족에 속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 안셀무스는 고집스러우며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했던 그의 아버지와 갈등을 많이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온화하고 영리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해소했다고 합니다.

우선 안셀무스는 어머니에게서 종교 교육, 그 당시로 하면 기독교겠네요. 종교교육을 받았고, 당시의 주된 교육기관인 수도원, 말하자면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사들로부터 체계적이면서도 엄격한 종교 교육과 문법, 수사학 그리고 논리학을 배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1056년 무렵에 어머니가 여동생을 낳고 사망하자, 안셀무스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집을 떠나서 3년 정도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방랑 생활 첫해에는 소르본 대학의 모태인 파리의 클뤼니 대수도원을 비롯한 프랑스에 산재해 있는 유명한 여러 수도원 학교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고요. 아마도 그때 스승인 란프랑크를 만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1059년경 가을에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에 있는 베크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베크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온 지 1년 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안셀무스는 고심 끝에 루앙의 대주교인 모리의 권유에 따라서 정식으로 베네딕트 수도회에 입회해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1063년 스승인 란프랑크가 캉의 성 스테판 수도원의 원장으로 부임을 받고 베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란프랑크는 노르만인 윌리엄공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왕이 죽자 그의 사촌인 윌리엄 공은 에드워드 왕의 매형인 헤롤드 고드윈과 왕위 계승 전쟁을 하게 되었고, 헤이스팅즈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윌리엄은 1070년에 란프랑크를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안셀무스 또한 훗날 그의 스승의 후계자로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하게 됩니다.

1063년에 스승 란프랑크가 수도원을 떠나자, 안셀무스는 그의 뒤를 이어 베크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067년에는 이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대표작인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을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아울러 수도원의 교육을 질적으로 한층 더 발전하게 하고, 베크의 베네딕트회 수도원 학교를 프랑스 최고의 수준으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젊은 수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을 온유함과 애정을 갖고서 인격적으로 교육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명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수련하며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안셀무스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감정을 절제하고 인내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벌이나 그 외에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안셀무스가 생각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헌신적이면서도 무한한 사랑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결국 수사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1078년에 수도원의 창설자이자 원장인 에르뤼엥이 사망하자 수사들은 모두 안셀무스를 수도원 원장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자신이 원장으로서 적임자가 아니라며 진심으로 고사했으나, 결국 그를 대신할 인품과 학식을 가진 자가 없다고 판단한 루앙의 대주교는 안셀무스를 베크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안셀무스가 수도원 원장이 된 후 베크 수도원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의 명성은 베크 수도원이나 프랑스에만 머무르지 않고, 앵글로 노르만의 나라인 영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1093년에는 영국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영국의 왕으로부터 영국 최고의 종교적 권한과 국왕 다음으로 막강한 정치적 권한을 소유한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이 또한 처음에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동료 주교들이 간곡히 부탁하자 결국 스승 란프랑크의 뒤를 이어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부임했습니다.

안셀무스는 영국 국왕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처음에는 고사했다가 교황인 우르반 2세가 구두로 동의를 하고서야 그 직책을 받아들였습니다. 영국 국왕이 임명했을 때는 직책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교황의 동의를 받고서야 대주교 직책을 수락한 안셀무스였기에, 취임했을 때부터 영국 국왕이 직접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렇듯 안셀무스가 영국 국왕의 성직자 임명에 관해서 계속 반대하고 또한 교회의 자유를 위해 영국 국왕에게 저항하자 1097년과 1103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안셀무스는 영국 국왕과 영국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교황 우르반 2세를 인정할 것을 국왕과 성직자들에게 요구하면서 국왕 윌리엄 2세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또한 안셀무스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자신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고 또한 영국 국왕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국왕이 외면상의 갈등을 피하고자 안셀무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정도 화해가 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계속해서 교회의 자유와 성직 계급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대주교가 로마의 교황청과 독자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영국 국왕과 국왕이 임명한 성직자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그는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망명하는 도중 교황 우르반 2세의 요청으로 로마에서 잠시 머물렀으며, 살바토레 수도원의 영지인 스클라비아에서 지내면서 최고의 신학 저술인 <신은 왜 인간이 되었는가>를 집필했습니다.

안셀무스는 1100년 윌리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헨리 1세에 의해서 복권되어 캔터베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 임명에 대한 영국 국왕과의 견해 차이로 인해 1103년에 다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 2차 망명 시기 동안 영국 국왕과 안셀무스는 화해를 도모하게 되고, 1106년에 결국 화해를 하게 됩니다.

영국 국왕은 대주교에게서 빼앗았던 캔터베리 대성당의 재산을 돌려주고, 안셀무스는 영국 국왕이 성직에 임명했다 파문한 주교들을 인정하기로 서로 간에 타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마침내 영국에서의 성직자 서임권에 대한 갈등은 끝이 났습니다.

사실상 세속 국왕의 성직자 서임에 대한 문제는 안셀무스가 베크의 수도원에 있을 때가 정점이었습니다. 특히 독일(당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클뤼니 대수도원 출신으로 이상주의적 개혁 성향을 지닌 강력한 교황이었습니다. 그가 하고자 한 개혁의 주된 내용은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교황권의 독립과 성직 매매 금지 그리고 성직자의 혼인 금지 및 세속 권력자의 성직 임명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과 더불어서 강력한 교황권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는 결국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서임권(임명권)에 대한 문제로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반황제적인 독일 국내의 귀족들과 결탁했고, 황제는 도시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안팎에서 공격을 받자 결국 카노사에서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1077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안셀무스 또한 이때 카노사로 가서 교황의 주장을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살레르노로 유배를 보냈고, 교황은 그곳에서 병사하고 맙니다.

영국 국왕과의 갈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캔터베리에서의 안셀무스의 삶은 무척이나 불행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러한 마음의 갈등을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극복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안셀무스는 그가 그렇게 떠나고자 했던 영국의 캔터베리에서 1109년 4월 21일 성주간 수요일에 임종합니다.

생애가 기네요. 그렇다면 그의 저작을 먼저 살펴보시죠.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입니다.

<모놀로기온>은 안셀무스가 체계적으로 저술한 첫 작품으로서 하느님의 본질을 명상한 것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명상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수사들과 대화하며 강연했던 것을 글로 옮긴 저작입니다. <프로슬로기온>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장 사변적인 시도, 곧 신존재증명을 하는 자리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인가를 말로 정의하지 않고 내용과 형식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을 알아보시죠. 그의 사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신 존재증명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이성입니다. 원래 종교라는 것이 이성보다는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자나요? 하지만 안셀무스는 이성을 믿음 아래로 놓지 않았습니다. 이게 생각보다 중요해요. 그냥 믿어! 이런 것이 아니라 생각해보자! 하는 것이지요. 신이 있어 믿어! 그런 것이 아니라 신이 진짜로 있는지 생각해보자! 하는 것입니다.

모놀로기온에서 신 존재증명은 

첫 번째 존재들은 완전한 아름다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그 아름다움 최고의 선은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지요.
두 번째 우리들에게 공통의 부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공통의 부분들은 결국은 하나의 완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지요.
세 번째 사물이 소유하는 완전성에 대한 의문입니다. 다른 물건보다 나은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물건보다 결코 못하지 않는 그런 한 자연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프로슬로기온에서는 

첫째로 하느님은 그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러나 이 이상으로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그것은, 정신 즉 관념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므로 하느님은 관념, 즉 정신 안에만이 아니라 정신 밖에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본 안셀무스는 이정도로 하겠습니다. 단어로 정리하면 이성과 믿음 그리고 신존재 증명이 되겠네요. 한 주간 건강하시고 다음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팟캐스트, 팟빵에서 방송하는 '철학인물사'를 기사로 만든 것입니다.
#철학 #인물 #안셀무스 #신존재증명 #김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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