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사약노금(躍爐金)
조성우
각왕전 뒤편으로 산식각의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석굴에 노인과 호랑이 모습이 묘사된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기도를 드린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석굴에 설치돼 있으며 출입문 없이 개방되어 있다.
산신각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해서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보통 산신각에서는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기도가 많이 행해지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조성돼 있다. 불교의 석가모니불보다 높은 자리에 산신각을 짓고 토착신앙을 계승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석사의 일주문 뒤에 자리한 작은 비문이 눈길을 끈다.
"네마리의 용은 각자 동서남북을 수호하고팔각등은 속세의 중생들 마음에 등불이 되니어찌 자비를 따르지 않으리오.연화는 오랜 세월 속에 불교의 상징이었으며힘찬 호랑이의 모습은 동양의 상징이었다.'산은 산이요'라는 깊은 뜻을 중생들 마음에등불 밝혀 부처와 함께 안식하여라."또한 제석사의 맞은 편 산자락에 계룡산 삼신당이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제석사와 마주 보이는 곳에 위치한 삼신당은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뒤 조선을 건국, 왕위에 올랐다는 명당으로 신라시대에는 왕용암, 고려시대에는 수심대, 조선시대에는 삼신당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1925년 정원강이 삼신당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했던 곳으로 1983년 6·20사업에 따라 모든 무속·신흥종교 시설들이 철거되었으나 역사성과 주변 경관 훼손 방지 등을 위해 존치돼 오고 있는 상태다.
이곳은 각종 무속·신흥종교의 요람이었던 신도안의 종교적·향토적·역사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 장소다. 사학계에서는 이곳의 역사적·민속학적 가치를 재조명이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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