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의 자취송동은 송시열 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 커다란 바위에 ‘증주벽립’이란 우암의 필적이 남아있다. 지형을 보고 앵두꽃 핀 예전 송동을 상상할 수 있다
김정봉
송동은 우암 송시열 집이 있어 송동이라 불렸던 곳이다. 단오절에 시인묵객들이 몰려들어 앵두놀이를 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조선말 '숭동(동숭동) 앵두장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송동 앵두가 유명하긴 하였던 모양이다.
반촌은 소를 도살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기도 하였다. 소 도살과 소나무 베는 일, 주조(酒造)를 엄격히 금지하였던 조선시대에 소 도살과 판매권을 갖는 것은 특권이었다. 김주영 장편소설 <객주>에서 한양의 유명한 장수를 얘기하면서 '동촌(명륜동)으로 가면 쇠고기장수'라 한 것도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성균관대학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반촌 간판을 단 소고기 가게는 물론 반수, 반촌의 흔적은 없었다. 모두 예전 말이 되었다. '반촌관(泮村館)'이란 고깃집 하나는 있을 법 한데…….
송동 앵두놀이, 이화동 그네놀이동촌 응봉자락에는 흥덕동천이 흘렀고 낙산 서쪽 계곡부에 쌍계동천이 있었다. 쌍계동천은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있던 명승지였다.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두 줄기 맑은 시냇물이 흘러 예부터 삼청동천, 백운동천, 옥류동천, 청학동천과 함께 한양 5대 동천(洞天) 중 하나로 뽑혀 곳곳에 정자가 들어섰다. 그 중 하나가 이화정(梨花亭)이며 이화동 유래가 되었다.
낙산 아래 이화동은 약수로 이름 꽤나 날린 동네다. 낙타를 닮아 낙산(駱山)이니 이 약수를 두고 낙타유방이라 불렀다. 그네로 유명하여 '단오절에 호탕한 사나이들이 그네놀이 하는 부녀자를 먼 발에서 곁눈질해 보던 곳'이었다는 재미난 기사도 있다(1936년 3.21, 동아일보).
흥덕동천과 마찬가지로 쌍계동천은 모두 복개되거나 집들이 들어서 사내 가슴을 들먹거린 그네놀이는 모두 옛말이 돼버렸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온 곳은 낙산 윗동네, 이화마을. 일본식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어 50, 60년대 마을 모습을 엿볼 수 있다.